처음의 인상이 들어맞았다. 드라마의 배경만 복고가 아니라 내용까지 복고다. 이야기구조가 상당히 흔하다. 익숙하다. 그런데 그 방식마저 이렇게 옛스런 냄새가 난다. 한 마디로 신파다.
이정혜(남상미 분)의 캐릭터에서 어느 정도 느낌이 오기는 했었다. 이정혜야 말로 가장 고전적인 한국드라마의 여주인공상일 것이다. 그저 사랑하고 사랑받고 마냥 인내하며 기다린다. 무언가 직접 하는 법이란 없다. 그래서 강기태(안재욱 분) 스스로도 말한다. 무언가 해주는 여자보다는 무언가 해주고 싶은 여자를 자기는 더 원한다고. 옛날남자 스타일이다. 그리고 그런 강기태의 요구에 이정혜는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정혜가 하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아침 물안개처럼 흐린 표정으로 울고 웃으며 강기태를 바라보고 걱정해주고 그의 성공을 기뻐해주는 것 뿐이다. 무엇이든 강기태를 위해 직접 나서서 해주고자 하는 유채영(손담비 분)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강기태가 잡혀들어가고 이정혜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을 때 유채영은 직접 궁정동을 찾아가고 있었다. 혹시나 강기태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는 일본에서 성공한 아버지와 다시 만나게 된 상황에서도 마냥 걱정이나 했지 유채영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방법을 찾아 나서지는 않았다. 비록 유채영이 선택한 방법이라는 것이 강기태를 함정에 빠뜨려 위기로 내몬 장철환(전광렬 분)이라는 것이 문제였을 뿐.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면 이정혜 또한 엉뚱한 차수혁(이필모 분)을 찾아가 그를 자극하고 있지 않았는가.
배우로서조차 그녀는 사실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었다. 무엇을 하려 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심지어 그녀가 어떤 배우인지조차 드라마에서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마치 유령같다. 그림자같다. 실체 없는 허깨비같다. 그녀의 역할은 단지 강기태와 사랑을 나누는 것. 장철환에게 잡혀와 위협을 당하면서도 짐짓 강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지만 거기에서 멈추고 만다. 요즘의 드라마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요즘의 드라마에서는 여주인공 역시 상당히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드라마의 주시청자층 자체가 그와 어울리는 연령대이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같은 시간대 <드림하이2>는 10대와 20대를 그 대상으로 삼는다. <샐러리맨 초한지>는 20대에서 40대까지 직장인들이 주로 볼 것이다. 그렇다면 70년대 쇼비즈니스를 배경으로 삼은 <빛과 그림자>는 누가 많이 보게 될까? 옛스런 그 시대의 모습 만큼이나 촌스러운 이야기구조며 연출, 캐릭터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 시대에 가장 크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같은 구조와 스타일에 익숙한 시청자일 것이다. 그래서 이정혜의 캐릭터는 시대착오적으로 고전적이다. 까놓고 말해 구시대적이다. 답답하고 때로 짜증이 난다.
아니나 다를까 차수혁을 인질로 잡은 시점에서 드라마의 복고적 취향은 그대로 폭발하고 만다. 그야말로 드라마의 말미에서나 나왔어야 할 법한 모습들이었다. 강기태는 총을 겨누며 눈물로 왜 그랬느냐고 묻고 차수혁은 울컥하여 눈물을 그렁이며 가슴에 묻어두고 있던 말을 건넨다. 상당히 함께 울컥했어야 했을 감동적인 장면이었는데 어째서 걱정부터 앞서는지.
이정혜와의 전화통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끝이라 생각했기에 그랬을 것이다. 이것으로 모두 끝이다. 하필 그 순간 최성원(이세창 분)이 70년대 유명했던 2인조 칼빈강도사건의 주인공인 이종대와 문도석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 여겼기에 차라리 장철환과 조명국(이종원 분), 그리고 차수혁까지 모두 죽이고 자신고 같이 죽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그토록 비장하다. 감동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민망하게 여겨질 정도로 감정이 극단을 치닫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적으로 말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역시 전통적인 드라마의 문법이다. 보기에 어색하고 거슬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감정만 넘치고 있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제 겨우 32회다. 50회 예정이라면 앞으로도 18회라는 분량이 더 남아 있다. 여기에서 있는대로 감정을 폭발시키고 나면 다음에는 어쩌려는가? 감정이 극치에 이르면 더 이상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평형상태가 찾아오고 만다. 일종의 허탈함이다. 한껏 울고 화내고 긴장하고 갈등했으니 이제는 어지간한 자극에도 무덤덤하다. 여기서 이렇게까지 판을 키워버렸는데 상황이 김재욱(김병기 분)이 의도한 대로 좋게 풀기데 되면 이후로는 어떤 식으로 다시 감정을 고조시키려는가? 마치 속기라도 한 듯 허탈해 할 시청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다시 장철환과 조명국, 차수혁 등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그리고 이정혜에 대한 애절함을 고조시켜 연결해 주려는가.
클라이막스가 클라이막스인 이유다. 클라이막스가 지나면 다시 평형상태가 찾아온다. 서서히 고조시켜서 정점에서 터뜨린 뒤 고요한 정적 소게 나머지를 마무리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렇게 일찍 터뜨려 버리고 나면 이후로는 도대체 어찌하려는가? 어떻게 하면 지금과 같이 시청자로 하여금 함께 고조되도록 할 수 있을까? 드라마의 클라이막스에서는 어디까지 끌어올려 얼마나 거창하게 터뜨리려는 것일까? 아니면 나머지 18회 잔잔하게 천천히 끌어내리려는가.
무언가 방향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원래는 강기태가 장철환에게 힘을 키워 복수하는 과정에서 7,80년대의 생소한 쇼비즈니스의 이면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굳이 강기태는 빛나라쇼단의 단장이 되었고 마침내 빛나라기획의 사장까지 되어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승승장구한 것이 문제였다. 강기태에게도 시련을 하나 주어야 하는데 여기에 김재욱과 장철환의 정치싸움이 아줏 맛깔나게 버무려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양념의 힘이 너무 셌다. 지나치게 승승장구하는 가운데 쇼비즈니스에 있어서의 긴장감은 희석되고 오히려 장철환과 김재욱 사이에 벌어지는 암투가 더 긴장감 있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에 맞춘다. 대마초파동으로 장철환은 김재욱에게 한 방 먹이게 되고, 그런 가운데서도 강기태와 어우러져 장철환의 약점을 잡은 김재욱이 반격을 준비한다. 강기태는 단지 들러리에 불과하다. 장철환에 의해 감옥에 넣어졌고 김재욱에 의해 구해질 수 있는 상황에 놓였다. 강기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자폭하거나, 아니면 도망가거나, 그도 아니면 단지 기다릴 뿐이다. 과연 모든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원래의 쇼비즈니스로 돌아갈 수 있을지.
차라리 일본으로 떠나느니만 못했다. 드라마는 조금 지저분해지더라도 일본으로 떠나고 다시 세월이 흘러 훌쩍 성장한 강기태가 돌아와 남아 있는 장철환등에게 복수한다. 가장 오랜 복수의 모티브 가운데 하나다. 아니면 남은 18회 분량을 영화 <홀리데이>가 그러했듯 인질극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시청률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차라리 이대로 깔끔하게 2회 이내에서 조태수(김뢰하 분)와 강기태의 인질극으로 끝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단지 강기태와 쇼비즈니스라는 원래의 의도는 김재욱과 장철환의 주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만큼 김병기와 전광렬의 연기가 주인공들을 압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참 걱정이다. 드라마를 이제 도대체 어떻게 수습하려는지. 이렇게까지 판을 벌려 놓았는데 어떻게 수습하고 어떻게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는지. 김재욱이 준비하고 있는 반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에 더욱 다음이 불안해진다. 김재욱의 반격이 무위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김재욱의 반격에 치명상을 입고 장철환이 무너지거나. 어느 쪽이든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제껏 드라마와 맞춰가고 있던 감정이 기만당한 듯 한 순간에 흐트러지고 만다. 재미가 없어진다.
도대체 유상준(김용건 분)의 잃어버린 딸 이야기는 언제까지 나오려는 것인지. 이정혜의 잃어버린 아버지 또한 언제까지 언급되려는 것일까. 혹시나 김재욱이 장철환에게 제대로 반격을 가한 뒤 그쪽을 통해 강기태의 도피를 주선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럴 경우 또 남는 사람은. 그다지 중요하게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뜸을 들인다. 역시 옛날스럽다.
중심을 제대로 다잡을 필요가 있다. 드라마는 어떤 드라마인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가? 시청자는 드라마에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시청자로 하여금 기대하게끔 만드는 것도 제작진의 능력이다. 그것이 곧 드라마의 재미다. 제작진은 지금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 것인가.
당황스러웠다. 황당했다. 허탈했다. 어쩌려고 이러는 것인가. 너무 갑작스러워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같이 울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다. 실망보다 걱정이 앞선다. 안타깝다. 안쓰럽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506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를 품을 달 - 죽은 자와 행복한 자, 비극이지만 해피엔드다. (0) | 2012.03.16 |
---|---|
해를 품은 달 - 안타까운 설의 죽음, 그러나 설명이 너무 길다! (0) | 2012.03.15 |
샐러리맨 초한지 - 리니지, 나라 잃은 공주가 마녀로부터 마침내 나라를 되찾다! (0) | 2012.03.14 |
빛과 그림자 - 좌충우돌 강기태, 조명국을 찾아가 총맞다! (0) | 2012.03.13 |
샐러리맨 초한지 - 유방의 모순, 그게 다 직원과 국민에게 가는 겁니다. (0) | 2012.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