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드라마와 민폐논란 - 완결된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까칠부 2012. 8. 3. 09:01

아마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를 보면서 흔히 입에 올리게 된 단어일 것이다.

 

"민폐"

 

물론 그것이 고의에 의한 것이라면 민폐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악행'이라는 단어를 쓴다. 역시나 언제부터인가 너무 쉽게 쓰게된 단어 가운데 하나다.

 

과연 무엇이 민폐인가? 결과적으로 주위에 피해를 입혔다.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는 상관없다.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사용했는가도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되었는가도 아랑곳않는다. 단지 결과가 주위에 좋지 않게 나왔다. 그러니 그 책임을 묻는다.

 

그래서 평소에도 사람들은 그리 말하는 것일 게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괜히 나서서 일을 망치기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않고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으면 욕은 덜 듣는다. 이를테면 어렸을 적 익숙한 교실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이거 아는 사람?"

 

초등학교 시절에는 제법 많은 아이들이 어찌되었든간에 손을 들고 '저요'를 외치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들어갔을 무렵에는 손을 드는 아이들만이 항상 손을 들고 있었다. 물론 틀린 답을 말할 걱정이 없는 아이들이었다. 어째서일까?

 

당연히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이미 결정되어 있는 답을 묻는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해진 답과 다른 답은 틀린 답이다. 틀린 답은 잘못된 것이다. 비난을 받는다. 비웃음을 산다. 놀린을 당한다. 한 마디로 망신이다. 차라리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정답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답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끄럽고 싶지 않다. 미안하고 싶지 않다. 하찮게 여겨지고 싶지 않다. 그같은 강박에 어느새 나서서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을 꺼려하게 된다. 차라리 방관자로 남음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 스스로 나서서 실수를 자초하려 하니 얼마나 보기에 우습겠는가?

 

결국은 완결된 세계에 그 답이 있다 할 것이다. 더구나 TV드라마는 그 답이 정해져 있다. 누가 옳고 그른가도,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도, 그리고 결말이 어떻게 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시청자는 이미 알고 있다. 모르더라도 불과 한 시간 남짓 이내에 그 결과를 알게 된다. 철저하게 닫혀 있다. 그 닫힌 세계에서 정답은 어느때보다 명확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이 된다. 틀린 답을 말한 아이에게 야단을 치는 매몰차고 엄격한 선생님이다.

 

대부분의 민폐논란이 그렇다. 그래서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조차 나온다. 무언가를 하려 하면 두렵다는 말마저 나오고 있다. 그것은 틀린 것이다. 그러니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동기가 무엇이든, 어떤 수단과 방법을 통하든, 어떤 과정을 거치든, 그것은 틀린 행동이고 그 행동을 하는 자신도 틀린 것이다. 틀린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우리사회의 완고한 경직성을 나타내주는 단어이기도 할 것이다. 조금의 어긋남도 없는 완결된 세계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세계일 것이므로. 개인은 그같은 완성된 세계를 이루는 한 부분에 불과하다.

 

현명해야 한다. 영리해야 한다. 유능해야 한다. 미리 예측해서 책임질 수 있는 행동만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완결된 세계의 일부분으로써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같은 능력과 자질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의 다양성이란 없다. 개인의 예측불가능성도 인정되지 않는다. 완결된 세계인 만큼 개인 또한 완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로부터 벗어난 말이며 행동들이 답답하고 화가 난다. 바보같고 어리석어 화가 치민다. 차라리 악역의 악행보다도 그것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다.

 

실제 그렇게 요구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책임질 행동만 하라고. 자유 또한 책임을 전제한 자유다. 꽉 짜여진 완결된 세계에서 개인의 몫은 그만큼 없다. 객관식으로 이루어진 답안지 속에 개인의 의견이란 없다. 우연도, 실수도, 오류도, 그리고 타의에 의한 불가항력도. 그것은 단지 오답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민폐가 된다.

 

사실 <공주의 남자>에서도 주인공 세령이 그렇게 민폐라 할만한 문제있는 행동을 한 것은 그다지 없었다. 최근 방영중인 드라마 <각시탈>에서도 목단은 항상 최선을 다해 현실에 부딪히려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오히려 가만히 있으려면 주위의 엑스트라들이 가만히 있었다. 대부분의 단역들이야 아무것도 않고 그저 가만히만 있는 채였다. 실제 역사상의 일제강점기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방관자로만 남았을 뿐이었다. 목단처럼 어떻게든 몸으로 부딪혀가며 무어라도 해보려 한 이들은 극히 일부였다. 그런데 결과만으로 그를 민폐라 하겠는가?

 

최선을 다해 살았다. 단지 현실이 그녀들의 최선을 용납해주지 않았다. 아버지였고, 연인이었다. 일제강점기 일본제국주의는 이미 조선을 온전히 지배하고 있는 중이었다. 경찰을 이길까? 아니면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비밀결사를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처럼 방관자가 되는가? 아니면 때를 기다린답시고 숨죽이고만 있는가? 그들이 영악하지 못한 것을 비난받기에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다. 그런데도 오로지 정답만을 강요한다.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는 반드시 무언가 이유가 있다. 어째서 민폐라 부르는가? 어째서 민폐라 부르며 그들을 비난하는가? 특별히 비난할만한 행동을 한 것은 없다. 악의를 가지고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생각이 있어 그같은 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라리 악역의 악행보다도 더 크게 비난한다. 완결된 세계가 깨져나간다. 완성된 세계가 어긋나기 시작한다. 완벽한 세계에 흠이 생겨난다. 강박이다. 그런데 그렇게 배우고 자라난다. 완벽하기를. 완결된 세계에 완벽한 일부가 되기를.

 

그러고 보면 연예인에 대한 대중의 완고한 도덕적 요구란 그것은 무의식의 반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강박에 의한 스트레스다. 그것을 연예인에 투사하여 발산하려는 것이다. 연예인의 명백한 잘못을 질타함으로써. 연예인이 저질렀다 여기는 잘못들을 비판하고 꾸짖음으로써. 정의를 실천했다. 바른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 자신은 옳다.

 

조금은 안타까운 것이다. 사람이 살다 모면 실수도 있다. 잘못도 있다. 오류도 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는 것도 있다. 항상 옳을 수만은 없다. 항상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만도 없다. 그래서 관용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사람이 하는 행위는 항상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책임이 있고 자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가 있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세계는 완결되어 있지 않고, 인간 또한 완성되어 있지 않다. 완벽하지 않다.

 

목단(진세연 분)는 참으로 무력하다. 처음에는 제법 싸움 좀 하는 것처럼 나오더니만 이제는 거의 동네북 신세다. 무언가 꾸며보려 해도 일본제국주의의 경찰은 그같은 목단의 섣부른 지혜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도 죽는다. 무언가 해보려 해도 죽는다. 그렇다면 차라리 무언가 해보고서 죽어도 죽겠다. 그런 목단이기에 각시탈(주원 분)이 구하려 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까? 목단이 그저 방관자이기만 했다면 담사리(전노민 분)도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비난을 듣는다. 서글픈 현실이다. 차라리 침묵하는 방관자이기를 바란다. 그러기를 강요한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란 말 그대로 스스로의 의지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자신의 탓이 아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않으려 했다면 그같은 고초를 겪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나서서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았다면 드라마속 수많은 엑스트라처럼 그녀 역시 아무 존재감없이 문제없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민폐를 이야기하기에는 그녀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이 너무 크다. 어리석지만 어리석을 수밖에 없는 의지가 있다. 존엄이 있다. 인간이 있다. 그것을 마냥 비난만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비난을 한다. 안타까운 것이다. 

 

필자가 무척 좋아하는 말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성공하는 것이며, 그 다음 좋은 것은 실패하는 것이고, 가장 나쁜 것은 성공도 실패도 않는 것이다."

 

최소한 의도한 것이 있을 때 나쁜 것도 존재한다. 의도란 의지에서 비롯된다. 의지란 양심이다. 이성이다. 인간이 존엄한 까닭이다. 그들이 엑스트라1, 2가 아닌 이름까지 부여받은 주인공인 이유다. 심지어 미디어에 기사로까지 민폐논란이 불거지는데 따른 생각이다. 필자 자신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을 떠올리게도 한다. 무척 스스로 불편하다.

 

물론 덧붙이자면 이 또한 정답이 아니다. 오답일 수 있다. 형편없이 틀릴 수도 있다. 다만 생각하게 한다. 고민해보게 한다. 정답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계기가 된다. 생각하는 이유이고, 말하는 이유이고, 행동하는 이유다. 굳이 이런 장문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