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소녀의 느낌이었다. 얼핏 내 또래처럼도 가끔 여겨지고는 했었다. 지금이야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그러나 벌써 28살이나 되었다는 사실이 당시 내게는 꽤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었다. 하기는 소녀의 모습으로 방송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 해던가. 하지만 그녀는 영원히 소녀일 것만 같았고 내 또래의 여자아이일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잘 웃고 잘 떠들었었다. 왁자하게 웃으며 밝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그런 아픈 개인사가 있으리라고는. 어렸을 적 부모의 이혼과 그리고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자신의 이혼, 무엇보다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오빠 장현의 병은 그녀를 항상 지독한 좌절과 고독으로 내몰고 있었다. 결국 오빠를 간호하며 얻은 불면증이 그녀를 수면제에 의지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그녀가 죽음에 이르는 이유가 되고 말았다. 하늘은 어째서 이와 같이 재능있는 이들에게 이토록 가혹하기만 한 것인가. 벌써 필자의 나이가 그녀를 한참 굽어볼 나이가 되었다.
천재였을 것이다. 아무리 '소녀와 가로등'과 같은 좋은 노래를 벌써 14살이라는 한참 어린 나이에 작곡했을 정도면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절박함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하고 싶은 말도 전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을 것이다. 그것을 들어줄 이도 전할 이도 그녀의 주위에는 그다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노래를 불렀고 또 노래를 지었다. 그녀의 노래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나 혼 자면 어때요 난 아직 어린 걸, 슬퍼지면 어때요 울어버리면 되지."
"떠난 님이 그리워 방황하고 있어요. 미워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나."
외로움에 지지 않는다. 슬픔에 짓눌리지 않는다. 헤어짐에 방황하지만 그렇다고 미움이라는 감정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슬프지만 밝고 애절하지만 강하다. 그녀를 대변하는 듯한 노래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녀의 노래에서 위로를 얻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생명력이 어쩌면 그녀를 영원한 소녀로 남게 했을 것이다. 필자보다 한참 나이가 많았음에도 아직도 그녀는 그래서 필자에게 소녀로 기억되고 있다. 너무나 밝고 사랑스러웠던 소녀로.
벌써 그녀가 떠난지도 23년이다. 시간은 참으로 무심해서 어느새 그녀에 대한 기억마저도 추억의 저편에 묻어두려 한다. 그녀의 발랄했던 웃음도, 사랑스러웠던 표정들도, 애절했던 노래들도, 단아하면서도 세련되었던 스타일 역시. 그녀가 방송에 나오면 즐거웠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어느새 따라부르고 있었다. <불후의 명곡2>에 소개된 노래 전부를 지금도 아무 무리없이 따라부를 수 있다. 아직도 그녀는 필자의 곁에 있다.
왁스의 무대는 조금 버거워 보였다. 록을 소화하기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여린 것이 아닌가. 성량도 부족한 듯 보였다. 무대에서의 퍼포먼스는 어색했다. 하지만 노래가 갖는 감정과 힘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그녀는 여전히 탁월했다. 헤어짐을, 그 슬픔을, 그로 인한 방황을, 심지어 미움의 감정까지 모두 이겨내려 하는 고독과 당당함을 사이케델릭의 강렬한 록사운드에 실어 훌륭히 전달하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왁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무대에서 그녀는 언제나 고독하며 그리고 강하다. 아름답다.
엠블랙과 소유의 '너 나 좋아해'는 그 노래를 처음 발표할 당시 장덕의 나이가 그들 또래였음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었다. '너 나 좋아해'라고 하는 주제를 반복해 변주하며 화려하면서도 흥겨운 클럽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애절한 도입부와 소유의 등장, 그리고 이어진 역동적이면서도 화려한 퍼포먼스. 신세대의 당당함이다. 그 시절에도 장덕은 그리도 도발적으로 솔직한 또래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었다. 이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그들의 '너 나 좋아해'다. 경쾌하지만 가볍지 않고 신나지만 얇지 않다. 상대가 조금 버거웠다.
나르샤의 '사랑하지 않을래'를 듣다가 문득 자신이 80년대로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고 있었다. 전형적인 80년대풍의 멜로디와 가사, 그리고 마치 그 시절로 돌아온 듯한 패션과 율동에 가까운 춤사위까지. 의도적으로 그리 구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스스로를 '나돈나'라 불렀다. 그 시절 모두를 놀라게 했던 마돈나를 연상하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도 당시 장덕의 나이를 훌쩍 넘기고 있다. 힘겨워하는 모습마저 그녀에게는 너무 잘 어울린다. 즐거웠다.
노브레인의 '소녀와 가로등'은 록의 사이케델릭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모두에게 보여준 무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마치 현실과 죽음 이후의 다른 시간을 이어주는 것처럼, 마치 어느 샤먼의 죽은 이를 불러들이는 초혼과도 같이, 아니 스스로 죽음 이후의 시간으로 걸어들어가 죽은 이들을 만나려는 것처럼, 그렇게 음울하고 처절하며 장엄하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 사이케델릭이란 마치 마약을 한 듯한 환각을 뜻한다. 아마 노래를 부르는 그들의 주위로 장덕이 다시 돌아와 자신의 노래를 불러주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을까. 슬프지조차 않은 경건함이 다시 그녀의 존재를 일깨운다.
뮤지컬 배우들만의 직업병인 모양이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뮤지컬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다. 보다 드라마틱하게 구성해서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듯 이은하가 불렀던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은 노래가 마치 대본처럼 한 편의 뮤지컬로 압축되어 무대에 올려진다. 무대 위에서 그는 배우이고 노랫속의 주인공이었다. 어찌보면 느끼하기까지 한 그의 표정과 몸짓들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가수라기에는 배우였다. 그는 노래로써 연기하는 사람이다.
참으로 공교롭다. 어째서 하필 이 노래였을까? 편곡까지 절묘하다. 이지형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록의 사이케델릭과 만나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어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듯하다. 마지막 인사처럼. 이렇게 오랜만에 먼 곳의 그녀와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니 예정된 시간처럼 슬픔보다는 해후의 기쁨으로 그녀를 떠나보내고자. 이별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기억이 있는한 영원한 헤어짐이란 존재할 수 없다. 문득문득 그녀를 떠올리면 그녀는 다시 우리의 곁으로 돌아온다. 우리가 아닌 그녀로 하여금 잊지 말라고. 다시 만날 것이라고. 슬프지 않아 더 슬픈 흥겨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지형이 사람을 울렸다. 울어버렸다.
그동안 잊고 있었다. 아니 아주 잊지는 않았다. 가끔이라기에는 아주 자주 필자는 그녀의 노래를 혼자서 흥얼거리며 부른다. 외로울 때. 힘들 때. 쓸쓸할 때. 문득 노래를 부르고 싶어질 때. 의도해서가 아니다. 일부러 부르려 해서가 아니다. 노래가 필자를 부른다. 어쩌면 노래에 깃든 장덕이 필자를 부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시간들이 펼쳐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더가? 어쩌면 영원을 살게 될 그들이기에 하늘은 그들에게 이처럼 가혹한 것일지도. 타고난 재능에 비해 너무나도 불우했던 삶과 갑작스런 죽음 역시.
오랜만에 추억에 젖어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 역시 그녀의 팬이었다.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의 음악을 좋아했다. 나이를 먹어가는 필자와는 달리 여전히 소녀의 모습인 그녀를 지금도 좋아하고 사랑한다. 비감에 젖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바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노래를 불러본다. 너무 많이 불러 부른다는 느낌조차 거의 없는 그녀의 노래를. 노래가 그녀를 다시 부른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불후의 명곡2>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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