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 드라마를 보지 않았는가 조금 전에 깨달았다. 내가 히로스에 료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싫어한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데는 사실 대단한 이유따위 필요없다. 그냥 싫다. 그래서 와타베 아츠로라는 대단한 배우가 출연함에도 일부러 보지 않았다.
스산하다. 삭막하다. 어쩌면 일본인들이 한국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일 것이다. 한국인들이 일본드라마에 빠져사는 이유다. 그들의 냉정함이 부럽다. 그들의 단호함이 부럽다. 때로 사람은 관계에 지쳤을 때 고독을 꿈꾸고는 한다. 그리고 고독에 지쳤을 때 관계를 그리워한다.
원작의 레이지는 참으로 고독한 사내다. 아무것도 의지할 곳이라고는 없이 고독하게 목적없이 세상속에 허우적거리며 살아간다. 반면 <그겨울>의 오수는 여전히 관계 속에 있다. 때로 다른 오수에게 의지하며, 때로 박진성에게 응석도 부리며, 문희선이 곁에 있어 안도하기도 한다. 박진성의 부모와 그리고 문희주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조무철, 그에 비하면 원작의 레이지에게는 돈을 받아내기 위해 접근하는 청부업자조차 영업적인 웃음을 머금은 타인에 불과하다.
그런 전제에서 시작한다. 끈끈하게 이리저리 얽힌 관계 가운데 놓인 오수와 철저한 단절 속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레이지. 그들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조차 다르다. 처음부터 오수는 오영의 존재를 바랐고, 레이지는 우연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래서 오수와 오영의 사랑은 더 운명적으로 여겨진다. 질척이며 무언가 알 수 없는 들끓는 감정이 그들 사이에는 존재한다. 그에 비하면 원작의 사랑은 너무 깔끔하다.
일본드라마가 갖는 강점과 단점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을 것이다. 깔끔하다. 탐미적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다. 한국드라마가 갖는 강점과 단점이 그래서 비교되어 동시에 드러난다. 질척이며 끈적거린다. 부담스럽도록 복잡하게 얽혀든다. 어쩌면 가깝지만 서로 다른 두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의 차이이기도 할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지나칠 정도로 관계에 의지해 살아간다.
확실히 와타베 아츠로는 대단한 배우다. 때로 그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섬뜩함마저 느낀다. 매우 냉정하게 철저하게 계산된 연기를 한다. 그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는 항상 그래서 완벽하다. 조인성과 비교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에 비하면 조인성의 연기는 어딘가 허술하면서 오수 자체가 되어있는 듯하다. 역시 두 나라의 드라마가 갖는 작지 않은 차이가 아닐까.
아직은 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그다지 끌리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전형적인 일본드라마의 문법과 형식에 질려버린 것이 꽤 오래전이라. 한 4년 쯤 전이었으면 무척 재미있게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한국드라마 특유의 부담스러운 나머지를 더 좋아한다. 한국사람인 까닭이다. 나이를 먹고 있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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