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드라마만 보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르겠다. 정도전(조재현 분)은 본디 유학자였다. 중국문화권에서 왕권의 절대성은 바로 유교적 가치와 논리에 근거하고 있었다. 성리학 역시 왕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왕권을 부정하고 신권을 주장한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현대의 민주주의 아래에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올 것이다. 국민이 곧 국가의 주권자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안에서 국민이 직접 나서서 정책을 입안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을 뽑아 행정부를 맡기고, 국회의원을 뽑아 입법부를 맡긴다.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국민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권력은 바로 그를 위한 것이다. 대통령이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거나 실해에 옮긴다고 해서 그것이 국민을 부정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완성된 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같은 선출직들이 보다 강력하고 안정적인 권력을 가지게 된다. 당장은 독재자의 권력이 더 강해 보여도, 결국 군대와 비밀경찰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권력이다. 끊임없이 당근을 제시하며 위협하고 감시해야 한다. 반대자를 색출하고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의미없는 정책들을 베푼다. 반면 민주국가의 경우 국민 스스로가 자신들이 선택한 합법적인 권력에 기꺼이 복종하며 그를 지키려 한다. 국민이 곧 권력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는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해 국민이 바라는 바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국민이 위임한 국민의 권력이다.
분명 다양한 이해와 주장들이 공존하고 있을 조정에서 총재가 강력한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한 근거가 필요한 법이다. 다른 반대자와 경쟁자들을 누를 수 있는 힘이 총재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런데 총재는 왕이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 주어지는 신분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비롯될까? 당장 이성계(유동근 분)와 정도전의 관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도전이 조정의 모든 실권과 군권을 한 손에 틀어쥘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성계가 그것을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정도전의 총재정치를 승락했기에 정도전 역시 그것을 마음껏 행동에 옮길 수 있었다. 이성계가 죽이려 했다면 죽었다.
실제 조선왕조 내내 무능하거나 난폭한 왕도 드물었지만, 마찬가지로 무능하고 탐욕스러운 재상 역시 매우 드물었다. 아무리 왕권이 미약한 때라도 왕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신을 죽이고 갈아치울 수 있었다. 신하들에 의해 추대된 왕이라 왕권이 약했다고 하지만 중종 역시 자기가 뜻한 대로 조광조를 등용했고 마침내는 직접 자신의 입으로 그의 죽음을 명령했다. 그를 노리고 다양한 입장과 주장들이 왕을 중심으로 모여 서로를 견제하며 공존하고 있었다. 왕이 신하를, 신하가 왕을, 신하들이 서로를,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고 경계한다. 서로를 채찍질하고 연마한다. 만일 사소한 틈이라도 보인다면 공격이 가해질 것이었다. 그런 균형과 조화가 무너졌을 때 바로 조선후기 조선을 망조에 들게 만든 세도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세도정치는 강력한 왕권에 기반하고 있었다. 숙종에 의해 한결 강력해진 왕권은 영조와 정조를 거치며 탕평을 통해 조선의 권력구도를 재편하게 된다. 한 마디로 이제까지의 문벌이나 당이 아닌 왕과 얼마나 가깝고 먼가가 권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왕과 혈연인 외척으로서였다. 세도정치의 시작인 안동 김씨의 김조순부터가 원래는 정조에 의해 세자인 순조의 후견인으로 선택된 경우였었다. 탕평에 의해 사대부간의 경쟁과 견제가 사라지면서 왕권에 기대는 방만하고 나태한 권력이 나타나게 된 것이었다.
어차피 세자 이방석의 말처럼 집이 크면 집주인이 일일이 모든 것을 직접 챙기가 어려운 법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일을 나누어 맡겨야 할 텐데, 집주인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았다는 자체가 결국 집주인을 등에 업은 권력처럼 되어 버린다. 유례없이 강력한 왕권을 누렸던 명나라가 결국 황제의 측근인 환관의 전횡에 무너지고 만 것이 그런 이유에서였다. 태종이나 세종, 문종과 같이 왕이 직접 나서서 모든 사안을 챙기려 하지 않는다면 그로부터 호가호위하는 제도밖의 권력이 나타나고 만다. 단종을 죽이고 즉위하여 강력한 왕권을 누렸던 세조 역시 부족한 정통성을 측근들로 채우려 하다 보니 부패와 타락의 빌미를 만들고 말았다. 그럴 바에는 아예 왕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는 총재의 존재를 제도화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밝은 곳에서 총재의 자질과 역량에 대해서도 견제와 감시의 대상으로 삼자.
천도를 둘러싸고 왕과 독대하는 하륜(이광기 분)의 모습과 도당에서 대신들과의 공론을 통해 천도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정도전의 태도는 바로 그를 위한 장치일 것이다. 왕의 의지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기에 왕과 개인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무리가 나타나게 될 지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왕과 소통하는 몇몇 개인에 의해 중요한 사안들이 결정된다. 그에 비해 공론을 통한다면 치열한 논쟁을 통해 옥석을 가리고 최소한의 합의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 불만은 곧 불안의 원인이 된다. 공로을 통해 결정된다면 그에 반대할 명분도 사라진다. 하륜과 정도전이 가지는 가치관과 기질의 차이이기도 하다.
총재란 어찌되었거나 왕의 신하다. 왕이 임명한다. 다시 말해 왕이 해임할 수 있다. 단지 주어지는 권한이 막강할 뿐인데, 그러나 결국 근본적으로 다른 신하들과 다를 바 없다. 얼마든지 끌어내릴 수 있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 경쟁을 통해서 검증을 통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인물이 최소한 총재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다른 신하들과 왕 자신이 납득하고 동의한 인물이 총재의 자리에 앉게 된다. 실제 조선의 재상들이 그랬다. 그러나 왕을 끌어내리거나 갈아치우는 것은 곧 반역이다. 그 무게가 전혀 다르다.
왕이 개인의 의지를 가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너무 크다. 너무 무겁다. 잘못을 저질러도 바로잡기가 힘들다. 윗대의 누군가가 그리 정했다면 후대에 그것을 바꾸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신하의 잘못이야 그를 탓하고 책임을 돌리면 그만이지만 왕의 잘못은 왕 자신의 권위와도 연관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의 국민과 다른 점은 왕이란 개인이라는 점이다. 다수의 여론과 개인의 주관적 판단은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 실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데 크게 공을 세운 하륜의 경우 많은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음에도 이방원의 배려로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방원이 비호했기에 아들인 세종 또한 그를 벌주지 못했다. 하륜을 비호한 것이 만일 정도전이나 신하 가운데 누구였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왕권이 약해서가 아니라 왕권이 너무 강해서다. 왕권이 충분히 강하기에 총재 역시 충분히 강한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총재 개인의 권력이 아닌 왕이 위임한 권력이다. 왕이 죽으라 하면 시늉이 아닌 실제 죽어야 하는 총재인 것이다. 다만 실무까지 왕 자신이 직접 챙기는가, 아니면 그것을 신하들에 맡기는가. 정확히 권력이 아닌 권한이다. 실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 확인가능한 권력을 원한다. 그것이 요점이다. 내 손을 통해아 권력이다.
사병을 혁파하는 것은 중앙집권을 위한 전제다. 권력이란 곧 폭력이다. 가용한 물리력이 곧 권력의 기반이 된다. 전근대사회다. 개인이 폭력을 소유한다면 권력은 그들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방원이 왕자시절에 사병혁파에 반대하다가 정작 왕이 되고 나서 사병혁파를 강력하게 추진한 이유였다. 조정의 군대가 왕의 군대다. 조정에 위임한 권력은 곧 왕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단지 이해의 차이다. 실무에 대한 권한까지 모두 독점하기를 바라는 욕심이 작은 양보조차 용납하지 못하게 한다. 누가 소유하느냐가 아닌 누가 쓰느냐다.
이방석과의 논쟁이 흥미롭다. 이방석을 통해 정도전의 사상을 드러낸다. 천하는 공물이다. 그 천하를 위임하여 가지는 것이 바로 왕이다. 대신이란 그런 왕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일 것이다. 천하가 모두 왕의 것이니 왕이 개인적으로 가져야 할 것이란 없다. 개인의 의견마저도. 개인의 양심과 정의마저도. 왕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오히려 이방원이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 하기는 정도전을 죽이고 즉위하여 태종이 된 뒤 이방원 역시 정도전이 그려놓은 길을 대부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 차이였을 것이다.
과연 왕이란 자리가 갖는 잔혹함일 것이다. 혈육마저 없다. 둘 다 자신의 아들들이지만 세자로 세운 막내 방석을 지키려면 이방원을 내치지 않으면 안된다. 왕이 아니었다면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을 테지만, 그러나 왕을 둘러싸고 너무 많은 욕망들이 얽혀 있다.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는 아들을 위해 이성계 역시 진심어린 눈물을 보여준다. 체면조차 잊고 왕이라는 권위마저 내버린 채 그저 마냥 엉엉 울고 만다. 그런 아버지를 기만한다. 아버지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다. 이방원도 운다. 권력이란 어쩌면 이리도 잔인한가.
이성계의 순진함과 이방원의 용의주도함이 대비된다. 이성계의 덕망과 이방원의 행동력이다. 그래서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이방원은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크기는 이성계가 더 큰데 승리하는 것은 이방원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일까. 그것을 작가가 어떻게 그려낼지도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이방원의 정의는 어떻게 묘사할까.
특별하게 훌륭한 왕이나 재상도 드물었지만 그만큼이나 특별하게 형편없는 왕이나 재상 역시 매우 드물었었다. 어찌 보면 심심하고, 그러나 한 편으로 안정적이다. 굳이 큰 변화 없이 그대로 500년을 이어 올 수 있었다. 그 비결을 말한다. 정도전이 그린 천년왕국의 꿈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던 또다른 꿈도 그려낸다. 태종은 자신이 손꼽히는 훌륭한 왕이었다. 바로 그 가운데 조선의 역사가 있다. 500년을 관통하고 다시 새로운 도읍을 통해 지금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정해진 서울이 지금의 서울이다.
명으로 가면서 이방원은 자신만을 위한 또다른 대업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위기이면서 기회다. 이방원의 반격이 시작된다. 음험한 모략가로서의 하륜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고 매력적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예정된 결말이다. 두근거리며 기대한다. 고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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