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대혁명 당시도 바로 어제까지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모였던 동지들이 한순간에 정적으로 돌변해 서로를 죽이는 일이 반복되고 있었다. 10월혁명을 주도하며 러시아혁명의 최종승자가 되었던 볼셰비키 역시 2월혁명까지 단지 여러 정파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었다.
혁명의 목적은 한 가지다. 바로 혁명이다. 그러나 혁명의 이유는 제각기 다르다. 시대라 부른다. 시대라고 하는 거대한 물결이 서로 다른 이유와 동기에서 시작도니 작은 흐름들을 하나로 모으게 된다. 부패하고 무능한 왕조를 타도하자.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을 바꾸자.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세상을 한 번 뒤집고 난 다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조국독립의 대의는 같았다.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으로부터 조선과 조선의 민중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당위에는 이견이 없었다. 다만 그 다음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갈릴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사회주의를 꿈꾸었고, 누군가는 부르주아적인 자유와 번영을 이상으로 여겼었다. 민족주의자가 있었고, 무정부주의자도 있었다. 해방 이후 그래서 좌와 우는 물론 좌익끼리, 혹은 우익끼리도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아니 아예 독립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적대하는 경우마저 적지 않았었다. 분열하기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서로가 생각하는 해방된 조국의 모습이 달랐을 뿐이었다.
민본의 나라를 만들자. 성리학의 이념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자. 한계에 이른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가능성의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대의에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누가? 무엇을? 무엇보다 새로운 가능성의 새로운 나라란 과연 어떤 것인가? 어떤 모습이고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대의에 함몰되어 전혀 그에 대한 논의나 합의가 시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왕이란 무엇이며 신하란 어떤 존재인가? 권신과 그의 당여라는 이제까지의 관계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이성계(유동근 분) 자신도 깨닫는다. 그동안 꿈꾸어 온 왕과 현실의 왕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성계 자신이 그리던 왕과 정도전(조재현 분)을 비롯 사대부들이 그리던 왕이 전혀 달랐다. 그나마 정도전에게 모든 것을 맡기겠다던 예전의 약속과 정도전 자신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그 간극을 메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강력한 왕이 직접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 이방원(안재모 분)에게 왕을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려는 정도전의 주장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조선은 이씨의 나라인데 어찌 다른 성씨의 재상이 다스린단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조정의 모든 실권과 군권까지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 정도전이다. 왕은 한 사람 뿐이며 정씨의 나라가 아니라면 마땅히 그것은 거부되어야 한다.
하기는 어차피 조준(전현 분)과 정도전도 서로 추구하는 바가 약간씩 달랐다. 당장 고려말 토지개혁을 두고 갈등이 첨예할 때도 끝까지 계민수전을 고집했던 정도전과는 달리 조준은 과전법이라는 대안을 통해 타협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성계가 막내아들을 세자로 세우고 도성을 옮기겠다 고집을 부리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반대하는 입장이던 조준에 비해 정도전은 어느 정도 이성계의 비위를 맞추는 선택을 하고 있었다. 정도전에 대한 급진파 사대부들의 신뢰가 그같은 정도전의 영합적 판단을 가려주고 있을 뿐이었다. 아예 목숨까지 내놓고 천도를 반대하던 윤소종(이병욱 분)이 정도전의 중재안에 연좌를 풀며 반기고 있었다. 얻은 것은 천도의 시기만은 도당의 의견을 듣겠다는 명분 정도였다.
윤소종의 죽음은 그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워낙 과격할 정도로 올곧은 성격의 윤소종이다 보니 급진파 사대부 가운데 그에 대한 신뢰가 역시 높다. 조준과도 친분이 있다. 정도전을 마음으로 따르고 있었다. 한 편으로 이미 조정의 모든 권한을 한 손에 틀어쥔 정도전에게 그 폭주를 막아줄 유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왕에게조차 두려움없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윤소종이라면 정도전의 잘못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을 터였다. 조준과의 관계에서도 중재자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었다. 적당한 때 - 이방원이 하륜(이광기 분)을 얻고 다시 왕위를 향한 야심을 불태울 때 윤소종이 죽고 있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그를 질투하거나 그로부터 소외된 이들의 원망 또한 높아진다. 이방원이 노릴 수 있는 틈이다.
원래 천도라고 하는 자체가 가장 온건한 방식의 숙청이었다. 왕이 머무는 도성에서 살 수 있다는 자체가 전제왕조시대에는 대단한 특권이었다. 전제군주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권력자가 보다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도성에 머물게 된다. 권력자들이 필요로 하는 인력을 도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제공한다. 상거래를 하고, 고용되어 일을 해주고, 아직 사병이 있을 때는 사병이 되어 권력자의 적과 싸우기도 했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며 지켜왔던 구조와 질서가 있었다. 그들이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일상들이었다. 그것이 무너진다.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시간이 충분치 않다.
이성계와 같은 고민을 했던 이가 고려에도 있었다. 서경의 무력을 등에 업고 혜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던 정종이었다. 그 과정에서 개경의 호족과 백성들 역시 다수 희생되었기에 민심은 사나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고려의 정종 역시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천도를 추진했었다. 그리고 역시 이성계와 같이 개경의 호족과 백성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차이라면 어차피 정종이나 그 뒤를 잇는 광종 역시 태조 왕건의 자식들로 고려를 계승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과, 이성계는 그런 고려를 부정해야 하는 조선의 태조였다는 정도일 것이다. 정종의 죽음과 광종의 즉위로 개경의 민심은 다리 고려왕실로 돌아왔지만, 그러나 끝까지 고려를 부정해야 하는 조선에 대해서도 그럴 것인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정리가 필요하다. 고려를 부여잡고 있는 구세력을 정리하고 새로운 왕조를 지지하는 새로운 세력들로 대신하도록 한다. 그 과정에서 적잖이 강제력이 작용하며 피가 흐르게 될 수 있다. 실제 고려왕조와의 단절을 위해 많은 고려의 왕씨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고려의 구신들이 새로운 왕조에 등용되는 사이 그들에게 고려를 일깨울 수 있는 고려의 왕씨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있었다. 개경의 백성을 바꾸기보다 새로운 도성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더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조정의 관리들 역시 그 기반은 개경에 있었다. 더욱 천도를 해야 하는 이유다. 고려와의 연결고리를 모두 끊어버린다.
천도를 계기로 이성계와 공신들의 유대를 약화시키려 한다. 이성계의 고집과 공신들의 반발을 하나로 묶어 이방원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들려 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이성계의 독선과 정도전의 독주가 결국 공신들 사이에 이반을 불러 이방원의 행사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침묵하게끔 만든다. 끝까지 이성계와 정도전의 편에서 이방원과 싸운 이는 극히 적었다. 있었다 해도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하륜의 의도가 작가의 의도다. 상승불패의 명장 이성계가 오랜 과정을 통해 힘겹게 얻어낸 조선의 왕위가 어떻게 허무하게 허물어지는가. 이성계의 오판과 정도전의 낙관을 보여준다. 모두 현실로부터 유리되어 있다.
원래 하륜이 이방원을 찾아간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정몽주의 편에 서느라 조선건국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못했다. 오히려 고려를 지키려다 죄인이 되었으니 새로운 왕조에서 그의 자리는 없는 것과 같았다. 일부 속내를 드러낸다. 가능성 있는 이방원을 왕으로 세움으로써 새로운 왕조에 자신의 자리를 - 그것도 큰 자리를 만든다. 실제 탐욕스럽고 부패하여 평가가 좋지 않았음에도 태종의 비호로 영화를 누리다 천수를 다한다. 인생의 승리자일까?
조금 갑작스럽다는 느낌도 있지만, 더구나 너무 직설적이라 허술한 느낌도 주지만, 그러나 마침내 정도전과 이방원이 끝내 서로 죽이고 죽어야 하는 이유가 나온다. 조선이란 어떤 나라인가. 조선의 왕이란 어떤 존재인가. 조선의 신하란, 조선의 사대부란 어떤 의미인가. 조선을 관통하는 주제다. 조선이 끝내 해결하지 못한 숙제일 것이다. 그렇게 마주선다. 정적으로서. 어제의 동지가 오늘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적이 되어 맞선다.
창업은 물론 어렵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이 수성이다. 서로 다른 이해주체가 있다. 창업에 동참했지만 서로 이해가 다른 다양한 구성원들이 그 안에 존재한다. 그것을 조율한다. 때로 죽이고, 때로 몰아내고, 때로 타협하면서. 그 과정이다. 정치란 권력이다. 빠르고 급하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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