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윤서인과 임금론 - 임금과 노동의 상관관계...

까칠부 2015. 4. 11. 01:16

솔직히 뭐라 평가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냥 직장생활이라고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누군가의 뭣도 모르는 헛소리라 여기고 말 뿐이었다. 노동과 임금의 관계를 과연 알기나 하고 떠드는 것일까?


사실 실제 대부분의 노동자는 윤서인이 말한 그대로 일하고 있다. 착각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임금이란 일의 양이나 가치를 계량하여 지불하는 댓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모든 임금은 일을 마치고 났을 때 그 양과 질을 따져서 지급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어째서?


노동자가 가지는 노동력 자체에 대한 댓가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어떤 일을 할 수 있고, 얼마만큼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의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댓가가 필요하다. 그만한 노동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이며, 따라서 사용자가 그만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비용이다. 단지 그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써 과거 자신이 한 일들을 계량하려 하는 것 뿐이다.


일단 노동자가 가진 노동력을 평가하여 계약을 마치고 났으면 그 다음은 온전히 사용자의 몫이 된다. 법이 정하고 계약서가 정한 한도 내에서 사용자는 그 노동력을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할 모든 권리를 가지게 된다. 어떤 일을 하고, 얼마만큼의 일을 하고, 어떻게 일을 할 것인지. 노트북을 만들거나, 자동차를 생산하거나, 이쑤시개를 팔러 다니거나. 그래서 얼마의 이익을 남길 것인가도 전적으로 사용자의 재량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 임금 이상의 이익을 거둔다고 노동자에게 더 많은 댓가를 지급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당지 양질의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상여금의 형태로 일부를 돌려주고 있을 뿐이다. 그 또한 노동력 자체에 대한 비용이다.


더구나 과연 자신이 한 일의 양이 아닌 가치를 어떻게 정확하게 계량할 수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박과장과 관련해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박과장이 요르단에서 억단위의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그 모든 것이 박과장 개인의 공적인가? 그만한 제품을 확보하고, 적절한 가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무엇보다 계약이 성사되기까지 음으로 양으로 자신을 도운 다른 직원들이 있었다. 하다못해 서류를 검토하는데 누군가 커피라도 한 잔 건네주었다면 그 역할 또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포함해 회사의 매출이 되고 이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의 노동력을 투입하여 얼마의 이익을 얻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용자의 판단이며 책임이다.


즉 100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100의 일을 하든 150의 일을 하든 결국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사용자 자신의 몫이라는 뜻이다. 150의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일을 맡긴다면 그렇게 될 것이고, 100의 결과밖에 내놓을 수 없는 일을 맡긴다면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사실 경영이라는 것도 상당히 고난도의 고급노동이다. 경영자의 판단에 따라 회사가 얻는 이익의 단위가 달라질 수 있다. 어지간히 작은 규모가 아니라면 직원 하나가 아무리 애써봐야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다. 아니 오히려 방해만 된다.


예를 들어 드라마 '미생'에서 장백기가 신입사원주제에 무언가 해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을 때 과연 그 결과들은 어떠했는가. 100의 임금을 지급한다는 것은 100만큼의 일을 기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200의 일을 하려 한다. 앞도, 뒤도, 위도, 아래도, 옆에서도 모두 100의 일을 하고 있는데 혼자서만 200의 일을 한다. 직원 10여 명 규모의 중소기업에서 마치 삼성과 같은 대기업에서와 같이 일하려 한다. 민폐다. 사용자 입장에서 불편한 것이다. 아니 그 전에 가능하지도 않다. 노동자란 회사라는 구조 안에 존재한다.


150의 일을 하고 싶다면 그만한 조건을 찾아서 가면 된다. 200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맞춰서 새로운 직장을 찾아가면 된다. 100의 임금을 주는 이유는 100의 일을 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150의 결과가 나와도 그것은 온전히 회사의 몫이다. 자기가 한 일이 아니다. 회사가 한 일이다. 자만하지 말라. 혼자서 그리는 만화가 아니다. 150의 일을 할 수 있는데 100의 임금만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방기다. 


더불어 과연 노동자가 몇 시간 정해진 시간보다 더 많은 일을 한다고 노동생산성은 향상되는가? 물론 추가적인 다른 수당은 없다고 전제했을 때, 그렇더라도 사실 기업의 입장에서는 크게 이익이라 할 수 없다. 어차피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이란 정해져 있다. 피로가 누적되면 집중력도 일의 효율도 모두 낮아지게 된다. 몰아서 너무 많은 일을 하려다 보면 컨디션은 물론 자신의 직무능력을 유지하거나 향상시키는데 투자해야 할 시간도 부족해진다. 사무실은 그저 공짜로 돌리는가? 어째서 한국노동자의 노동생산성은 선진국의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들 말하는가? 여전히 한국사회는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에만 집착하고 있다. 적은 임금에 일만 더 많이 한다고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튼 만화가답게 만화를 너무 많이 보았다. 직원 하나가 잘해서 회사가 커나간다. 직원 하나의 활약으로 회사의 이익이 갑자기 몇 배가 된다. 모든 임원과 직원이 주인공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 그런 뜻일까? 요즘은 드라마도 그렇게는 안 만든다. 현실은 다르다. 50의일을 더 할 시간에 차라리 학원이라도 하나 등록해서 하나라도 더 능력을 갖추는 것이 회사를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실시간으로 뉴스를 살피고, 영화등 대중매체등을 통해 감각을 키우고. 마르크스의 직관은 그래서 지금도 탁월하다.


글로벌시대다. 대통령도 젊은이들더러 해외로 나가라 등떠밀고 있다. 어째서 삼성은 그처럼 대한민국 최고수준의 임금과 복지를 직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가? 마음이 좋아서? 감동하기 위해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감동시키기 위해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고용하고 일도 시키는 것이고, 더 많은 월급을 바라며 노동자는 일을 하는 것일 터다. 전제가 다르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우수한 인력들을 이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온전히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 재미있는 이유다.


기업의 이윤이란 노동자가 생산한 노동가치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로부터 발생한다. 마르크스의 주장이다. 반시장주의자일 것이다.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인정도, 도덕도 아니다. 바로 이익이고 욕망이다.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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