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이런 것을 두고 시쳇말로 당나라군대라 하는 것일 게다. 부원수는 상관인 도원수의 명령을 무시하고, 조정은 최고지휘관인 도원수를 두고 다시 그 위에 도순찰사를 내려보낸다. 평시에는 도원수가 도순찰사의 상관이지만 유사시 도순찰사가 도원수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을 지휘할 수 있다. 일부러 싸움에서 지려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부원수 신각은 해유령에서 일본군을 무찌른 뒤 지휘계통을 쫓아 직속상관인 도원수 김명원에게 먼저 그 사실을 보고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 도원수는 부원수가 보고한 내용에 대해 그 진위여부를 확인한 뒤 다시 지휘계통을 쫓아 조정에 보고한다. 조정에서 명령을 내릴 때도 부원수인 신각에게 이러이러하라 일일이 명령을 내리기보다 최고지휘관인 김명원을 통해 그 명령이 전해지도록 한다. 간단히 이순신(김석훈 분)이 한산도에서 적을 무찌를 계획을 세우는데 휘하의 만호 가운데 조정에게 먼저 보고한 뒤 명령이 내려오면 그때 따르겠다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강방어선이 무너질 당시 부원수 신각은 도원수 김명원이 아닌 유도대장 이양원과 행동을 함께하고 있었다. 김명원이 다시 임진강 방어를 명령받고 군을 지휘하게 되었을 때도 그에 합류하기보다 이양원과 함께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신각이 이양원, 이혼 등과 함께 해유령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첫승리를 거두었을 때도 김명원은 전혀 그 사실을 보고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드라마에서 보여진 신각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김명원은 팔도도원수로서 조선군 최고지휘관이었고, 임진강 방어의 모든 책임을 지고 군을 지휘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고작 김명원 개인에 대한 반감 때문에 상관으로부터의 정당한 명령까지 따르기를 거부한다. 아무리 전장에서 승리를 거두고 공을 세웠다 할지라도 그냥 넘어갈만한 상황은 아닌 것이다. 참고로 당시 신각을 명령불복종의 죄목으로 죽일 것을 건의한 것은 비변사였고, 그 가운데 우의정이던 유홍이었다. 이름도 몇 번 나오지 않는 인물을 위해 새로이 캐스팅을 하는 것은 비효율적일 것이다.
다음주 방영될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일 것이기에 어째서 도원수 김명원과 도수찰사 한응인을 나란히 임진강 방어선에 배치한 것이 문제가 되었는가는 언급하지 않겠다. 당장 한응인이 왕명에 의해 도순찰사로 임명되어 도원수 김명원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파열음이 일기 시작한다. 직제상 도원수가 도순찰사보다 위인데다,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개인으로서도 김명원이 한응인보다 윗줄에 놓여야 했다. 그런데 정작 유사시 군지휘권은 도순찰사인 한응인이 갖는다. 한성방어의 실패와 신각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김명원의 발언권이 약해진 것이 이후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는데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역사드라마란 때로 단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불편케 만들 수 있다는 결정적 아쉬움이 있다. 군이라고 하는 조직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치군주의 한계일 것이다.
어쩌면 선조가 보이는 모습들이란 상당히 정감이 가는 것들이기도 할 것이다. 거듭된 패전에 자신감을 잃고 신경질적이 되어 버린다. 그러다가 7만이라는 숫자를 듣게 되니 벌써 승리라도 거둔 듯 얼굴에 여유가 가득하다. 전쟁이라고는 경험해 보지 못한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모습일 것이다. 그만큼 전쟁이란 낯설고 두려운 것이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의 대상이다. 더 많은 군대, 더 강한 무기만 있다면. 류성룡(김상중 분)이 비격진천뢰와 조총에 집착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2차세계대전 말 패전이 확실시되던 독일과 일본에서도 한 번에 불리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초월적인 신무기의 개발에 집착하던 이들이 있었다. 하필 200년만에 처음 겪는 전란에서 선조가 배운 것이 실망과 불신과 좌절과 분노였다. 짐승의 새끼가 처음 보는 대상을 어미라 여기듯 처음 겪는 난세의 경험은 이후 선조의 성격을 정의하게 된다. 그냥 인간일 뿐이다. 초인도, 성인도, 그렇다고 말종도 아닌 그냥 인간에 불과하다.
선조에 대한 해석과 묘사가 어느 경지를 넘어서고 있다. 그래서 더 비교된다. 전지에 전능이다.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곳에 존재한다. 관직도 없는데 귀순해 온 사야가에 대한 처분을 논의하는 자리에, 그것도 문밖에서 모든 것을 엿듣고 있었다. 7만이라는 숫자에 도취되어 임진강에서의 승전을 자신하는 선조의 앞에도 어느새 나타나서 패배를 예언하고 있었다. 류성룡이 말한대로 모두 이루어지고, 류성룡의 판단은 모두 옳았다. 그래서 더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은 한심하고 무능해야 했을 것이다. 류성룡이 이처럼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데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고전하고 있었다면 결국 다른 누군가의 책임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조가 류성룡을 신임하지 않아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선조의 잘못으로 류성룡의 혜안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유교국가에서 신하가 왕을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왕의 자질이나 잘잘못을 따져 평가하고 판단하면 그 다음은 무엇이겠는가? 선조는 난세에 어울리는 군주의 그릇이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적당한 사람을 찾아 왕을 바꿔야 할까? 그래서 너도나도 다른 판단을 하면 그때마다 다시 왕을 바꿔야 할 것이다.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든다로 임기가 5년인데 1년만에 다시 선거를 할 수는 없다. 왕은 왕으로써 그대로 존재하되 신하들이 그 나머지를 채워준다. 왕이란 단지 질료이며 그릇을 만드는 것도 그 그릇을 채우는 것도 모두 신하의 몫이다. 왕의 잘못은 모두 신하의 잘못이다. 정도전이 주장한 재상총재제도 바로 그같은 사고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왕의 그릇을 단정짓고 정면으로 싸우자고 덤벼든다. 전지전능에, 무소불위에, 이제는 시대마저 초월한다. 하기는 선조의 그릇을 평가한 것은 류성룡이 아닌 이산해(이재용 분)였다. 왕의 그릇이 어떠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릇에 맞추어 어떻게 바르게 보필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또한 재상의 그릇이다.
그래서 결국 다시 이순신이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조선을 구했듯, 이번에는 지리멸렬의 위기에 놓인 드라마를 구해야 한다. 더구나 잘생긴 이순신이라면 시청률의 위험에서 드라마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예산부족이 한눈에 보이는 드라마에서 어떻게 이순신의 활약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고작 말 몇 마디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순신의 활약에 바다가 막혀버린 일본군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통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드라마 전체가 답답하다. 시야도 좁은데 속도 좁다.
이천리(정태우 분)와 황설희(한지완 분)의 캐릭터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와 그들이 하는 역할을 아직 알지 못하겠다. 역시 류성룡의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평면적이고 정적이기에 그를 중심으로 한 두 캐릭터도 가라앉고 만다. 늦었을까? 차라리 사회자에 가깝다. 방관자이며 조언자다. 초월해 있다. 드라마로부터도 초월해 있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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