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프로듀사 - 실명과 기믹의 변주, 일상적이며 특별한 재미를 위해

까칠부 2015. 5. 17. 05:17

스타가 곧 보편이다.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안다. 정확히는 몰라도 얼굴 정도는 대부분 눈에 익다. 그 윤여정이다. 그 황신혜다. 그 금보라다. 현영이다. 인지도 있는 연예인들이 실명으로 등장하며 드라마를 위한 기믹을 만들어준다. 익숙한 연예인들의 실제와도 같은 모습들이 호기심과 함께 드라마에 대한 실감을 더해준다. 자연스럽게 드라마속 상황에 동의하게 된다.


과연 배우로서 영리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해를 품은 달'에서 위엄과 인간적인 매력을 두루 갖춘 임금을 연기하고, 이어 영화 '은밀하게 위험하게'에서는 서슴없이 망가지는 역할을 한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도 도민준이라고 하는 완벽에 가까운 캐릭터로 신드롬까지 일으켰다가 다시 '프로듀사'에서 완전히 텅 빈 듯한 어리버리의 끝을 보여주고 있다. 어눌하고, 눈치없고, 고지식한데다, 쓸데없이 디테일하다. 자신감이 넘치는 요즘 오히려 그래서 더 엉뚱하고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한 개성을 보여준다. 거의 끝에서 끝이라 할 정도로 전혀 다른 개서의 캐릭터를 전혀 무리없이 자연스럽게 연기해낼 수 있다는 자체가 배우 김수현의 역량이며 스타 김수현이 가진 매력의 증거일 것이다. 어떤 모습을 연기해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원래 사람 사는 것이 그렇다. 누구나 당당하고 싶다. 스스로 정의롭고 용기있는 영웅이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두려움에 맞서기보다 숨거나 도망치는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자기 힘으로 극복하기보다 쉽게 체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린다. 처음에야 당연히 똑바로 잘하려 다짐도 하고 노력도 해 보지만 결국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란 거의 없다. 꺾이고 부서지고 닳아 녹아 없어지게 된다. 처음 자기가 무슨 이유로, 어떤 마음가짐으로 지금의 일을 시작했는지 기억마저 남아있지 않게 된다. 자동차 수리비 때문에 마음에도 없는 친절을 베풀고, 차마 얼굴을 마주보고 하차통보를 할 수 없어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에게 모든 책임을 떠맡긴다. 그토록 거만하고 까칠해 보이던 신디(아이유 분)가 아직 어린 연습생들에게 호의를 베풀고 혼자서 몰래 얼굴을 가린 채 어묵을 사먹는다.


방송국 프로듀서라고 하는 소재의 특수성이 대중의 보편적 감성과 만나는 지점일 것이다. 어찌되었거나 백승찬(김수현 분)은 이제 갓 방송국에 들어와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딛는 신입사원이며 사회초년생일 것이다. 좌충우돌하며 단지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방송국의 현실에 조금씩 적응해간다.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른다. 사고도 일으킨다. 시작부터 무언가 대단한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옳다. 자칫 답답하거나 우울할 수 있는 내용임에도 그러나 자신을 완전히 비운 김수현의 연기가 드라마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 어눌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눈치없지만 어리석지도 않다. 좋아하는 여자의 남자친구 차에 쓰레기봉투를 걸어놓을 정도로 적당한 수준에서 자신의 악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마치 아직 어린 아이를 지켜보는 것 같다. 익숙한 유명연예인들의 색다른 모습은 거기에 의외의 재미까지 더해준다.


적당히 속물이면서 적당히 원칙도 내세울 줄 안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온정적이다. 본질은 선하지만 어느새 부조리한 현실에 자신을 맞추는 방법도 알게 되었다. 베테랑이다.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지킨다. 적당히 선을 넘지 않으면서 아슬아슬한 경계에 도전한다. 물론 대부분은 타협의 결과다. 쉽게 고개를 숙이고, 쉽게 사과부터 한다. 어쩌면 적당히 현실에 찌들어사는 라준모(차태현 분)와 탁예진(공효진 분)이야말로 백승찬이 장차 닮아가게 될 현실이었을 것이다. 순수한 열정보다는 타협과 계산이 더 어울릴 나이의, 그것도 너무나 현실적인 두 캐릭터가 서로 사랑에 빠지려 한다. 어릴 적 인연이 이어지는 것은 그를 위한 안전장치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에는 순수와 열정이 더 어울린다. 백지상태의 백승찬이 그들과 부딪히며 조금씩 성장해간다. 성장이란 내일에 대한 기대다. 그러면 그들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까. 아직 그들은 성장할 수 있다.


라준모가 매니저를 통해 신디에게 전한 김밥과 어묵이 이런 식으로 이어진다. '1박 2일'의 PD라는 말만을 전해들었다. 낯설기만 한 자신을 향한 호의였다. 이번에도 먼저 다가와서 자신에게 우산을 건네고 있었다. 목적이 있지 않을까 의심한다. 하지만 그 선의에 기대고 싶다. 신디가 굳이 백승찬이 빌려준 우산을 쓴 채 포장마차에 가서 어묵을 사먹는 이유일 것이다. 신디 역시 강압적인 다이어트로 인해 항상 굶주려야 하는 어린 연습생들을 위해 몰래 간식거리를 시켜먹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거만하고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녀에게 세상이란 오로지 불신과 경계의 대상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 역시 그들을 대상으로 여겨야 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백승찬의 순수가 그녀를 변화시키게 될까? 아니 백승찬 자신도 조금씩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캐릭터나 구조 자체가 무척 전형적이고 익숙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배경이 특별하고, 소품처럼 등장하는 소재들이 특별하다. KBS라고 하는 실제의 방송국과 실명의 유명프로그램, 그리고 연기자들이 등장한다. 진부함을 느낄 사이도 없다. 캐릭터의 매력을 자신의 매력으로 만드는 주연들로 인해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남자가 봐도 김수현은 매력적이다. 공효진은 로맨스에 최적화되어 있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한 차태현의 연기는 대체자가 없다. 아이유의 연기가 조금 겉돌고 있었다.


첫회에서 느낀 불안감은 2회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첫회 후반에서 이미 드라마는 드라마적인 재미를 회복하고 있었다. 분주한 일상 가운데 남모를 휴식이 에필로그를 채운다. 자기 자신마저 없이 쫓기며 사는 가운데 일탈처럼 잠시의 여유를 즐긴다. 뜻밖의 사건도 일어난다. 라준모는 탁예진에게 키스하고, 신디는 혼자서 어묵을 먹는다. 이야기는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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