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 역시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통쾌했고 감동적이었다. 이런 정치인만 있으면. 이렇게 정치만 한다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조금씩 불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혹시라도 드라마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어떻게 하는가.
정치를 혐오하거나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하는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이상화하려는 경향을 보이고는 한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와 정치인의 모델을 설정하고 그를 기준으로 현실의 정치와 정치인과 비교하려 한다. 그러므로 현실의 정치와 정치인은 얼마나 기준에 미달해 있는가. 부패하고 무능하다. 나태하고 이기적이다. 국민은 아랑곳없이 제밥그릇 챙기느라 싸움으로 날을 지새고 있다.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 정치는 불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외면한다고 정치가 사라지는가. 혐오한다고 정치인이 정치를 그만둘 것인가. 바른 정치를 바란다. 제대로 된 정치인을 기대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혐오하고 외면한다.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몇 년 전이었을 것이다. 선거가 끝나고 너무나 당당하게, 아니 심지어 어떤 우월감마저 느끼며 인터뷰하던 대학생이 생각난다.
"보아라. 어차피 이렇게 될 것 아니었는가. 이런 결과가 나올 것 굳이 번거롭게 내 시간 투자해가며 투표할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차라리 그 시간을 자신을 위해 투자하겠다."
그러나 그 시간을 자신을 위해 투자하는 동안에도 투표는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현실정치에 실망해서 투표를 거부했더라도 누군가는 그 시간에 투표소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위해 한 표를 행사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누군가에 의해 그가 원하는 후보가 최종적으로 당선된다. 자신의 바람과도 기대와도 전혀 동떨어진 후보가 당선되어 또다시 정치를 혐오하고 외면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고 만다. 만에 하나라도 자신을 위해 투자할 시간을 그나마 자신의 요구와 기대에 가장 가까운 다른 후보를 위해 한 표를 행사하는데 썼다면 어땠을까? 당장 눈에 차지는 않아도 그나마 개중에 가장 낫다.
압력이 된다. 더 나은 후보. 더 나은 정치인. 더 나은 정치. 더 더 더 나은 정치와 정치인. 유권자가 바라고, 실제 당선에 유리하다면 정치인도 결국 그런 후보를 내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정책을 궁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포기해 버린다. 아예 손을 놔 버린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크다. 기대와 실제의 차이가 차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조금 더 나은 정도로는 아예 대안조차 되지 못한다. 보고 있기가 힘에 겹다. 어차피 자신의 바람을 충족하지 못할 것이면 조금 더 나은 정도나, 그보다 더 못한 정도나 모두 같다. 가능성 자체를 배제해 버린다. 차라리 한 발 물러나 모두를 비웃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모든 정치인이 진상필 같으면. 진상필처럼 계파고 정당이고 이념이고 초월해서 오로지 국민만을 생각했으면. 하지만 드라마의 상황은 매우 특수하다. 의석 하나로 여야의 우위가 바뀔 수 있다. 조웅규가 당적을 바꾸고도 여전히 딴청계의 2석이면 여당과 야당의 의석수차이를 뒤집을 수 있다. 무엇보다 진상필 자신이 재선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재선을 목표로 했을 때 진상필 역시 다른 정치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홍찬미 또한 지역구 출마의 욕심을 버리고서야 진상필의 설득에 넘어올 수 있었다. 과연 정치인에게 권력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라 강요할 수 있는가. 국회의원이 아니게 되면 그들은 더이상 정치인이 아니게 된다. 권력을 가지려 하기에 그들은 국민의 눈치도 보고 국민에 잘보이려 노력도 하게 된다.
과연 현실의 정치란 어떤 것인가. 어떤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 것인가. 아직은 때묻지 않은 정치신인들의 올곧은 신념이 어떻게 꺾이고 타락해 가는가. 오히려 드라마 초반에는 그런 것들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진상필이 타협해야 하는 현실과 그로 인해 물들고 변해가는 모습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의 한계이고 모순이었을 것이다. 지역구에서도 유지들의 청탁과 압력을 쉽게 거부하지 못하고 흔드리는 모습을 보인다. 공천을 받기 위해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 대안은 무엇인가. 판타지로 끝난 것이 그래서 아쉽다. 구조는 조금도 건드리지 못하고 그저 개인의 영웅담으로 끝나고 말았다.
필자가 정치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결국 드라마 '어셈블리'도 그같은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 한때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시티홀'도 비슷한 유형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프레지던트'는 매우 사실적이었다. 원작과 우리의 정치현실이 너무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그 안에서 정치의 선악도, 호불호도 없는 비열하도록 냉정한 논리를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그같은 모순된 현실 속에서 자신들은 유권자로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여전히 대중은 드라마를 통해 판타지를 보려 하고, 판타지는 현실과 유리된 환상만을 남기고 만다. 현실이 되지 못하는 이상이란 단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어떤 행동을, 실천을 해야만 하는가. 정치인의 부정을 막기 위해 정치자금법을 개정해서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선거에서 일정득표 이상을 얻으면 그동안 쓴 정치자금을 돌려받을 수 있게끔 안전장치도 준비했다. 그러므로 합법적으로 선거자금을 모아서 법이 정한 안에서 마음껏 쓰면서 당선을 위해 노력해 보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진상필처럼 되려면. 계파도, 당도, 전혀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정치를 할 수 있도록 하려면. 그것이 결국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려면. 그런데 그런 것들이 안되니 결국 초월적인 영웅에 기대게 된다. 드라마 역시 진상필이라는 비현실의 영웅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선거때만 되면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누군가의 이름 뒤에 '바람'을 붙여 쫓아다니는 것이 어느새 이벤트처럼 되어 버린 이유일 것이다. 정치에 대한 실망이 정치 밖에서 다른 대안을 찾게 된다. 구조에 대한 무지가 모든 것을 무시하는 개인의 초월적 의지와 능력에 기대게 만든다. 그 사람이라면 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줄 것이다. 실제 최근 세 차례의 바람 모두가 정치를 부정하는 일관된 방향을 보이고 있었다. 국회를 무시하고, 의결에 이르는 과정을 부정하고, 오로지 독단으로 국민과 직접 마주보며 정치하려 한다. 그것을 오히려 반긴다. 가장 우려되는 부분이다. 독재는 그렇게 시작된다.
한 가지 더 아쉬운 부분이었을 것이다. 국민당이라고 하는 정당의 정체성이다. 국민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기대하는 바람이며 지향이다. 국민당의 지지자들은 과연 박춘섭과 진상필 가운데 누구를 더 지지하고 있을까? 박춘섭과 진상필이 대표하는 국민이 서로 다르다. 그동안 국민당이 일관되게 보여온 정책과 지향들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유권자들도 국민당에 대한 지지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와 전혀 다르다. 아예 반대편에 있다. 몸은 국민당에 소속되어 있다. 국민당에 맞서 야당인 한국민주당과 손을 잡는다. 정당정치를 부정한다. 정당이란 같은 정치적 지향과 이념을 공유하는 이들의 집합이다. 대표성을 부정한다.
드라마에서도 김규환이 정치를 혐오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정치를 불신하게 된 이유란 무엇이었는가. 모든 정치인이 진상필 같을 수는 없다. 그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한다. 여전히 현실에는 정치에 무관심한 이들이 너무 많다. 정치를 혐오하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정치가 타락하는 것은 그들의 타락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유권자가 그로부터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연하게 여긴다. 정치는 모두 썩었다. 정치인은 모두 같다.
드라마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는 뜻이다. 벌써부터 진상필을 들먹이며 현실의 정치를 모두 싸잡아 비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드라마는 잊혀진다. 하지만 학습된 무의식은 남는다. 아쉬움이 남는다. 어쩔 수 없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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