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란 신뢰다. 공동체란 신뢰의 집합이다. 손해가 아님을 안다. 일방적인 희생이 아님을 이해한다. 내가 하는 만큼 돌려받을 것이다. 내가 베풀고 배려한 만큼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내가 여기서 누굴 돕듯이 누군가 내 아들을 도울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빚일 것이다. 반드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에 큰 돈도 서슴없이 빌려준다. 갚을 능력이 있고, 능력이 안되더라도 충분한 담보가 있다. 굳이 당장 갚을 필요는 없다. 돌고 돌아 언제든 어떤 형태로든 돌아온다면 그때는 자신에게도 무척 요긴할 것이다.
그런데 그같은 신뢰의 기반이 무너진다. 그 담보가 되어줄 물적 토대가 사라진다. 당장 먹을 식량도 마실 물도 없는데 무엇으로 자신에게 진 빚을 갚으려 하는가. 오늘이라도 당장 사라져 영영 안보일지도 모르는데 도대체 무엇을 믿고 빌려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기적이 된다. 어쩌면 더 참혹한 현실과 직접 마주하고 있는 때문인지 모른다. 차라리 미래병원의 의사나 간호사들은 그런 현실로부터 어쩌면 한 발 떨어져 있는지 모른다. 피할 수 있는 벽과 지붕이 있고, 자가발전기로 돌아가는 첨단의 시설과 약품들도 있다. 전문적인 지식과 훈련을 쌓은 의료진 역시 적지 않다. 어떻게든 살릴 수 있고 살 수 있다.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도 있다.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어차피 그 한 사람도 죽을 수밖에 없다면?
돌려받을 방법이 없다면 당장 내가 먼저 써야 한다.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약이 없다면 당장 나라도 써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더 역설일 것이다. 가장 안전한 곳에 있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 상당한 거리를 두고 환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정부를 믿지 않는다. 환자를 믿지 않는다. 그것이 병원을 지키고, 자신을 지키고, 의사로서의 자신의 신념과 양심을 지키는 길이다. 강주란(김혜은 분)이 응급실 실장으로써 그동안 끊임없이 박건(이경영 분)의 방침과 요구에 타협해 온 것도 결국 그런 일환이었을 것이다. 제대로 된 설비를 갖추어 환자를 위한 최선의 이료를 제공하고 싶다. 그를 위한 가장 빠르고 가능성도 높은 방법이었다.
내가 나를 지켜야 하니까. 내가 나를 살려야 하니까. 아니라면 누구도 나를 책임져 주지 않을 테니까. 나와 내 가족을 책임져주지 않을 테니까. 모두가 절망에 신음하는 가운데서도 그래서 자기 몫부터 챙기려 한다. 어차피 내가 죽거나, 상대가 죽거나, 돌려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돌려주지 않아도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 지옥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주인공들은 희망을 찾아 환자들을 치료하고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안전불감증이 아니다. 신뢰의 부재다.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미리 준비를 갖춰야 한다. 막대한 비용과 수고가 들어가는데도 정작 아무일도 없으면 그 모든 것은 그냥 버려질 뿐이다. 다시 돌려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최소한의 기대조차 없이 끊임없이 소모와 희생을 강요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공평하게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는 것도 아니다. 누군가는 피하고, 누군가는 빠져나간다. 그로 인한 비용과 수고 역시 원칙과 규범을 지키는데 필요한 그것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작다. 무엇이 더 크게 이익이 되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손해가 적은가. 지금과 같은 국가적인 위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과 자신의 병원을 위한 최선인가.
문득 작년 일어난 어떤 끔찍했던 사고를 떠올리게 된다. 돈을 아끼기 위해 법이 정한 최소한의 장비조차 갖추지 않고, 돈을 더 벌기 위해 법으로 정한 한도를 넘어선 화물을 실어 날랐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법으로 정해진 메뉴얼조차 사고가 일어났을 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구하다 죽어간 이들의 순직조차 인정해주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인명을 구하려 찾아간 이들에게 사고의 책임까지 덮어씌운다. 희생자들의 보상이 많네 적네를 두고 아직까지 편을 갈라 싸운다. 과연 먼저 도망친 선장과 선원 몇 명의 개인적인 일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정똘미(정소민 분)가 기억하는 한우진(하석진 분)은 오로지 사람을 살리는 것만을 생각하던 사명감이 투철한 의사였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바꾸었는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그 노력과 성의를 인정한다. 설사 결과가 의도와 다르게 나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최소화한다. 사람의 선의를 믿는다. 선의를 인정한다. 굳이 더 큰 보상도 필요없을 것이다. 선의를 선의로써 인정해주고 존중해줄 수 있으면 된다. 신뢰란 결국 서로의 선의를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일 테니까. 하지만 한 번 일기 시작한 균열이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만다. 신뢰를 쌓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란 아주 작은 계기만 있으면 된다. 사람을 살려야 할 병원과 구조대가 자신의 입장과 이익만을 쫓는다. 사람들이 죽어가고 버려진다.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다. 병원은 사람을 살린다. 구조대는 사람을 구한다. 정부는 모든 혼란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 기본마저 흔들린다. 현실이라 말한다. 그에 맞추라 말한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식을 잃은 채 병원을 맡아 지휘하며 사람들을 살리고, 환자들을 이끌고 먼 길을 헤쳐온다. 홀로 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인간이 항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희생하기보다 타인의 불행을 틈타고, 양보하기보다 타인의 위기를 딛고 올라선다. 인간이 선량해서가 아니다. 인간에게 그럴 가치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래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인 때문이다. 묵시적인 재앙을 통해 구원처럼 그 답을 구하려 한다. 어쩌면 현실의 평온과 풍요로 인해 쉽게 잊혀버린 그것들에 대해서. 인간은 가장 이기적이며 이타적이고, 가장 탐욕스러우면서 헌신적이며, 가장 추악하며 아름다운 존재다. 지진이라는 혼란이 지진보다 더 참혹한 그 앙상한 날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어디로 가는가.
사람을 살리는 편에 선다. 사람을 지키고 구하는 편에 서려 한다. 그리고 싸운다. 지진보다 더 지독한 현실의 적들과 외로운 싸움을 벌인다. 그들이 내미는 손을 마주잡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큰 지진일 것이다. 굳이 생각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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