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

민주주의와 교과서 국정화 - 국정교과서를 반대해야 하는 이유...

까칠부 2015. 10. 26. 01:07

이를테면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라는 단어 자체를 문제삼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병역을 거부한 것이 양심적이라면 거부하지 않고 갔다온 사람들은 비양심적이라는 것인가. 그 말 뜻이 아니라 말해도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양심이란 하나밖에 없다.


민주주의란 다양성이다. 서로 다른 이해와 신념, 가치, 주의, 주장, 욕구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가장 필요한 것이 역시 서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자세일 것이다. 아니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는 자기와 다른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단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기 싫을 뿐 그들 역시 이 사회를 이루는 중요한 구성원들이다.


그만큼 서로 다른 다양한 생각이나 입장 등을 만나보아야 한다. 겪어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어울려 보아야 한다. 단지 생각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서로가 놓인 입장이 다를 뿐이다. 서로가 시민이고, 혹은 국민이며, 나아가 인류임을 인지한다. 그런데 하필 교과서가 국정 하나 뿐이다. 시험문제도 정답 하나 뿐이다.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오답이고 틀린 것이다. 과연 그런 사회에서 다양성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역사에 정답은 없다. 물론 부정할 수 없는 엄밀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과연 '진실'일 것인가. 일제강점기 조선의 쌀을 '수출'이라는 형태로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과연 '수출'이라는 형태를 띈 것이 사실이라고 '수출'된 것이 진실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거꾸로 일본제국주의의 일방적 의도에 의해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에 대해 수탈이라 정의했다고 그것이 '수출'의 형태를 띄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 판단을 했고, 어째서 그런 주장들을 하는가. 역사를 보는 눈이란 곧 현실을 보는 눈과도 통한다.


제 3세계에서 소수 지배계급만을 포섭하여 그들에게 모든 부와 권력을 독점케 하고 대신 싼값에 자원을 사들인다. 그것은 과연 정당한 무역인가, 아니면 선진국의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단지 약탈에 지나지 않는가. 그럼에도 제 3세계의 가난한 나라들로 흘러들어간 선진국의 자본이 그들의 경제를 지탱하는 요긴한 돈줄이 되어준다. 그럼에도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은 탓에 제 3세계의 국민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영토에서 생산된 자원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있다. 나아가 남미 등 제 3세계에서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치가들이 사유재산마저 부정하며 이들 소수 지배계급에 의해 독점된 산업시설을 국유화하는 것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진다. 


아니 무엇보다 과연 지금 현재 우리 사회에서 더 많은 수출을 위해 노동자로 하여금 더 인내하고 희생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물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더 적은 임금에 더 열악한 조건에 더 많은 일을 하여 국가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개인을 도구화 수단화하는 것이다.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고 판단할 것인가은어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교육이 해야 할 일은 그런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바탕을 닦아주는 것일 터다. 그렇다고 자신과 다른 결론을 내렸다 해서 서로 적대해서는 사회는 분열되고 말 것이다.


개와 고양이를 구분한다. 고양이와 소를 구분한다. 소와 닭을 구분한다. 어떤 이는 참치는 먹지만 닭고기는 먹지 않는다. 어떤 이는 우유까지는 먹지만 달걀도 거부한다. 심지어 자연적으로 떨어진 낙과조차 생명과 관계되므로 개고기를 먹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 그렇게 여긴다면 그렇게 행동하면 그만이다. 다만 말했듯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굳이 바로잡으려 하는 것은 상대가 틀렸다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그럼에도 끝끝내 성적소수자마저 교정하여 정상으로 되돌리려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째서일까.


틀리지 않았다. 잘못되지 않았다. 스스로의 양심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은 분명 옳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신념이다. 그런데 누군가는 틀렸다. 누군가는 잘못되었다. 다툼이 일어난다. 다수와 소수가 충돌하면 그것은 때로 일방적인 폭력으로 변질되고 만다. 모두가 담배를 피기에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담배를 물려 불을 붙이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누군가 자신만이 옳고 올바르다 여길 때 그에게 다른 사람을 교정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진다. 사회적 억압은 그렇게 발생한다. '올바른' 역사관이라는 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잘못된 역사는 타당한 논거와 논리로써 비판하여 바로잡는 것이지 일방적으로 폭력을 사용해 교정해야 할 대상은 아닌 것이다.


어째서 오히려 단일한 교과서가 더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게 될 것인가. 인간에게는 누구나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 스스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다. 맞고 틀린 것도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 강제하려 한다. 하나의 답만을 강요한다. 굴복하지 않는다면 반발할 것이다. 설사 당장 굴복하여 자신을 굽히고 꺾었더라도 진심이 아니라면 반발의 여지는 남아있을 것이다. 그저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존하느니만 못하다. 어째서 민주주의가 다른 체제보다 우월한가. 항상 혼란스럽고 시끄러우면서도 정작 더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서로 양보하고 인정하며 힘을 모으는 법을 안다.


오히려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여러 사이트들에서 여러 이슈들에 반응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어째서 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해야 하는가 이유를 확인하게 되었다. 획일화를 반대하면서 정작 자신은 자신과 다른 이들을 교정하여 정상으로 돌리려 시도하고 있었다. 비웃고, 비난하고, 심지어 모욕까지 가하면서 그것을 정의라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어느 사회에서나 있는 문제들일 것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그처럼 편협하고 일방적인 행동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그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더 낫게, 더 좋게, 더 바르게, 정의란 목적이 아닌 과정이다. 정의로운 사회란 그 정당한 과정을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사회를 뜻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렇게 학습되었다.


'올바른'이라는 단어를 오히려 더 경계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올바른'이란 결과가 아니다. 단지 과정이다. 보다 올바른 절차와 방법등을 통해 더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하나의 올바른 답을 정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한다. 권력을 동원하여 구성원 다수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려 한다. 폭력이 동반된다. 물리적인 폭력이 아닌 제도적 법적 폭력이다. 그것을 독재라 부른다. 가장 정의롭고 가장 도덕적인 이가 가장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독재자가 된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다른 답은 다 틀린 답이다. 틀린 답을 배제하거나, 아니면 옳은 답이 되도록 강제하거나.


민주주의 국가다. 더구나 앞에 '자유'라는 단어가 하나 더 붙는다. 자유주의 국가에서 권력이 강제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자유를 저해하려는 어떤 의도나 행위에 대해서만일 것이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되는 단 하나 경우 역시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방적인 태도나 입장에 대해서일 것이다. 다른 것을 부정하고 배제함으로써 딴 하나만을 남기려 한다. 단 하나의 정답과 단 하나의 정의, 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 그러나 과연 지금 여기 바로 이 사회에서 무엇이 상식인가. 과연 어디까지 가려는가.


양심이란 하나가 아니다. 하나가 옳으면 나머지는 틀리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사람의 머릿수만큼 많은 다른 양심이 존재한다. 스스로 옳고자 하는 의지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에 옮긴다. 따라서 모든 양심은 정의롭다. 그것을 인정한다. 어려운 이야기다. 상식일 터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