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당황스럽다. 무슨 의도인 것일까? 이런 내용들이 어떻게 드라마로 만들어져 내보내질 수 있는 것일까. 차라리 공중파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출신도 불분명한 용역회사 직원이 멋대로 심지어 경찰에게 지시를 내리고 신체에 폭력까지 휘두른다. 법을 어긴 것은 분명 사용자측이고 용역회사지만 도리어 법의 제제를 받는 것은 정당한 권리를 찾으려는 노동자들이다.
아니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상당수 노동자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노조는 기업과 사용자의 권리를 침해하여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위축시키고 나아가 국가경재에 큰 피해를 입히는 사회악적인 존재다. 노조가 없어져야지만 기업과 국가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경제도 좋아지게 될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노동자가 노조를 조직하여 사용자와 갈등을 빚는 순간 모든 비난과 책임은 노동자와 노조에게로 향하게 되어 있다.
"노조변호사까지 하던 분이 대통령까지 됐는데 왜 자꾸 데모를 해요?"
그러니까다. 달라질 줄 알았다. 더 좋아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거나 더 좋아진 것이 없었다. 기업이 살아야 경제도 산다. 기업에 피해를 주는 것은 곧 나라경제에 피해를 주는 것과 같다. 그나마 사회적 약자로서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던 것도 어느새 귀족이라 불리며 사회의 기득권으로서 질타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구고신(안내상 분)의 말 그대로였다. 함께 손잡고 싸우던 동지였지만 서는 곳이 달라졌다. 보이는 풍경도 달라졌다. 오히려 더 악랄했다. 누구보다 노조의 내부사정을 잘알고 있었기에 와해시키고 무력화시키는데 더 철저하고 더 지능적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높은 자리에서 권력을 가질수록 함께 싸울 동지는 줄어들었고 싸워야 할 적은 늘어만 갔다. 노조와 노조활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더욱 악화되어가던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래서 더 인상적일 것이다. 헌법에 명시된 당연한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섰던 이들이 겪어야 할 고통과 시련이라는 것은. 상식이고 정의였지만 최소한 이 사회에서 그것은 죄이고 악이었다.
노조가 합법인 것이야 너무 당연하고, 아예 의무교육과정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철저히 가르치는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다. 그러나 그런 프랑스에서 나고 배우며 자란 프랑스의 기업가들이 정작 한국에 와서는 아무렇지 않게 노조를 적대시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무시한다. 그래도 되니까. 그래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차라리 더 강한 역설로써 이 사회에서 노동자와 노조가 놓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단지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강요받거나 아예 해고당하는 경우마저 있다. 생계를 위협받으며 폭력과 심지어 법적인 처벌까지 감수해야 하는 노동자들에 비해 법원에서 판결이 내려져도 사용자가 지불해야 할 것은 약간의 벌금이 전부다. 불법으로 동원한 용역회사 직원들이 태연히 경찰간부가 보는 앞에서 경찰에게 지시를 내리고 폭력을 휘두른다. 현장의 누구도 그것을 보면서도 항의하거나 문제삼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 나라에서 지금 노조를 만들고 사용자와 싸우려 하는 것이다.
"그 얼굴로 왜 노조를 해요?"
싫어서가 아니었다. 옳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동기가 잘못되었기에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안타까웠던 것 뿐이다. 안쓰러웠던 것 뿐이다. 자기야 어쩔 수 없이 이 길로 들어서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야만 한다고 여겼으니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었으니까. 하지만 새삼 누군가 이 가망없는 길에 뛰어들려 한다면 뜯어말리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다국적기업이고, 더구나 젊은 나이에 과장까지 되었다면, 그렇다면 아무일없이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 지금까지처럼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테니까. 아무리 법을 배우고, 법원의 판결까지 끌어내도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현실 앞에 치떨리는 무력감마저 느낀다. 이런 앞도 보이지 않는 일에 뛰어드는 사람은 자신과 주위의 어쩔 수 없는 한심한 처지의 사람들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니까. 그 신념을 인정한다. 그 고집과 의기를 인정한다. 하다못해 시위현장에 동원된 의경이 입은 상처마저 끝내 나중에라도 묻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처음 보는 어린 의경을 위해 분위기도 살벌한 용역회사 직원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다. 그냥 바보다. 아닌 척 모른 척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갈 수 없는 멍청이 얼간이다. 똑똑하고 영리한 사람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일도 아닌데 굳이 편한 길을 버리고 더 힘들고 험한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자기 몫을 챙길 줄 아는 머리만 있어도 무엇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가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 번 절망과 좌절을 겪을 것이 두려워서도 구고신마저 주저하게 된다.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싸움이 거의 태반이다.
배우 안내상의 삶과 경험이 그대로 연기로 묻어나고 있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웃는다. 일부러라도 가볍고 유쾌한 자신을 꾸미려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다. 항상 진지하고 심각해서는 결국 버거운 현실 앞에 꺾이고 부러질 뿐이다. 좌절해도 웃고, 절망해도 웃고, 포기하면서도 또 웃는다. 울면서 웃고, 화내면서 웃고, 넋나간 채로 웃고, 주저앉아서 웃고, 그러다가 잠깐 진지해져서 한 마디 내뱉을 때면 벼린 칼날같은 시린 눈빛이 송곳처럼 후비며 들어온다.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양심에만 충실한 이수인의 올곧음 역시 지현우의 단정한 외모와 연기로 그대로 표현되는 듯하다. 과연 주인공이다. 무게감이 다르다.
하여튼 낯설다. 노동문제를 이렇게까지 정면으로 다룬 드라마가 없다. 하필이면 국내굴지의 대기업과 연관된 케이블TV이같은 드라마를 만들고 방영까지 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 가려는가. 이제는 더이상 노동관련 이슈로도 대형노조조차 투쟁에 나설 동력을 잃어가는 현실이다. 하기는 먼 옛날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정권도 몇 번이나 바꼈다. 두려움이기도 할 것이다. 혼란스럽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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