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역설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역사의 순리라 이해해야 할까? 하기는 그동안 정도전(김명민 분)이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정몽주(김의성 분)에게 집착하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동안 혁명을 위해 유자로서 정도를 벗어난 일들을 적잖이 해왔었기에 유자의 나라가 되어야 할 새로운 나라의 첫재상으로는 적합지 않다. 새로운 나라의 얼굴이자 머리이자 심장이 되어야 할 첫재상은 오로지 유자의 정점에서 모든 사대부를 아우를 수 있는 정몽주와 같은 이가 맡아야 한다. 결국 그대로 되고 말았다.
장차 이방원(유아인 분)이 일으킬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살해당하며 조선건국과정에서의 모든 죄업은 정도전 한 사람에게 지워지게 되었다. 실제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정도전이라면 개인의 욕심과 감정으로 무고한 고려의 충신들을 모함하고 살해했던 간신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었다. 1차 왕자의 난도 정도전이 원인을 제공하여 일어난 어쩔 수 없는 의거였었다. 이미 한계에 이른 고려말의 구조적 모순과 피폐하고 혼란스런 당시의 현실을 근본부터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나라를 기획하고 설계하여 건국한 혁명가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최근이다. 정도전이 역적의 오명을 벗게 된 것도 조선말 대원궁이 경복궁은 중건하며 건국초 정도전이 경복궁을 지은 공을 인정하여 신원하면서였다. 자신이 기획하고 설계한 새로운 나라 조선에서 정도전은 그런 존재로 남아 있었다.
반대로 1차 왕자의 난 당시 조선건국에 반대했기에 권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온건파 사대부의 지지를 받았던 이방원은, 정몽주와 동문이거나 그의 문인이었던 이들에 대한 보답으로 정몽주를 신원하여 그를 충신의 상징으로써 사대부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조선의 정신으로 삼고 있었다. 오죽하면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의 의거로 인해 서슬퍼렇던 세조연간의 정국에서도 정몽주의 손자였던 정보는 충신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목숨을 구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조선을 설계하여 세운 것은 정도전이었지만 이후 수백년동안 조선을 지키고 유지해 온 것은 정몽주의 정신이었다. 그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자의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마저 처음 정도전의 구상대로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비탈을 구르는 눈덩이와 같을지 모른다. 멈추는 그 순간까지 눈덩이는 계속 굴러야 한다. 지나온 거리만큼 눈덩이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눈이 달라붙으며 덩치를 키워간다. 지나온 시간들이다. 지나온 자신의 행위들이다. 자신의 삶이다. 지나온 삶 위에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짊어지고 새로운 삶을 다시 그 위에 더해간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삶을 고통이라 부르며 업을 쌓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후회없는 삶이란 없고, 미련없는 삶이란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은 살아간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포기하는 것은 너무 쉽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기에 모든 고통을, 수치를, 굴욕을, 상실을, 분노를, 원망을, 가슴에 담고 마지막까지 사람은 살아가려 한다.
책임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죽었다. 자신들이 이루고자 하는 혁명을 위해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그 가운데는 나라와 왕실을 위해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던 충신이며 노장 최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왕도 창왕도 모두 자신들이 왕으로 섬기던 이들이었다. 더구나 창왕은 죽을 당시 나이가 고작 10살도 채 되지 않았었다. 최영의 편에서, 혹은 조민수의 편에서, 그리고 고려왕실의 신하로써 충성과 의리를 다하려던 이들 역시 단지 자신들과 적대한다는 이유로 적잖이 제거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상하거나 죽은 자기쪽 사람들 역시 이미 상당하다. 여기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멈춘다면 그 죽음들은 무엇이 되는가. 여기서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면 굳이 그들이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물며 정몽주 씩이나 되는 인물이 그렇게 허무하게 비참하게 죽어가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바로 앞서 이방원이 말한 더러운 물에 손을 담그는 각오인 것이다. 자신에게 바라고 기대는 눈들이 있다. 자신을 향해 소망하고 꿈꾸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죽어간 사람들은 물론 앞으로 살아갈 이들 역시 외면할 수 없다. 개인의 이기이고 탐욕일지 모른다. 권력욕이고 공명심에 의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히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짐들을 인식한다. 자신이 무엇을 짊어지고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나가야 할지 결코 잊지 않는다. 선죽교에서 이방원은 정몽주와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는다. 자신이 버려야 하는 것들. 자신이 밟고 지나가야 하는 것들. 자신의 뒤에 차곡차곡 쌓일 그 죄업의 무게들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포기할 수 없고 이 길을 가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에게 지워진 책임이며 사명이다. 정몽주라는 개인에 대한 애정도, 존경도, 미련도, 갈망도, 모두 그 길 위에 뿌려질 제물들이다.
정도전도 선택한다. 벌써 오래전에 이루어졌어야 할 선택이었다. 정도전의 말처럼 응석을 부리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그 길이 너무 지치고 지겨워서, 그래서 혹시나 자신의 짐을 나눌 누군가를 애써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짐을 나눠지고 자신의 고단함도 나눌 수 있기를. 그러나 정몽주의 어깨에도 이미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짐이 지워져 있었다. 고려왕조 500년의 역사가 정몽주 한 사람의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버겁다고 자신의 짐을 내팽개칠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나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선의가 정몽주를 더 고통스럽게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 사람이 모드 질 수 있는 짐이 아니었기에 선택을 해야 했고 가혹해져야 했다. 자신이 그를 몰아세웠다. 악역을 맡을 것이면 자신이었어야 했다. 자신 역시 자신의 길을 포기할 수 없다. 포기할 수 있는 이유들이 있었다.
분이(신세경 분)가 벌써부터 어머니 연향(전미선 분)으로부터 듣고 고민하고 있던 것들을 이제서야 비로소 고민하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미 죽은 정몽주를 다시 살릴 방법은 없다. 비로소 깨달았다. 정몽주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야 말로 정몽주 자신이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한 정몽주 자신이었다. 정몽주가 정몽주인 동안에는 결코 그가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정몽주가 살았어도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그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 위에서 치워야 할지도 모른다. 괜한 화풀이다. 이방원으로 인해 가장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자신의 꿈꾸던 이상의 악취나는 그늘을 보고야 말았다. 정몽주의 목을 효수하고 그를 역적으로 몰아야 한다. 결코 자신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되는 말이지만 그러나 지금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역사의 무게다. 시대의 무게다. 인간과 삶의 무게다.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암살을 해야 했다는 하륜(조희봉 분)의 말에 이방원이 분노하는 이유다. 그것은 단순한 욕망이 아니다. 그저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고 왕족으로써 자신이 권력을 가지기 위해 저지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대의였다. 자신의 정의였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고 가치였다. 도망치지도 않는다. 회피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륜의 말을 계기로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모두로부터 당당해지려 한다. 자신이 그랬다. 자신이 죽였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정면으로 마주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정도전에게 기대며 물으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부족한 자기에 대한 확신이었고 나약함이었다. 확인해야만 했다. 아내 민다경(공승연 분)으로부터 들은 잘했다는 한 마디가 자신에게 큰 위로가 딘다. 아직은 어리다.
과연 십수년의 공백은 찰나에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무사에게 있어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대결을 강요하여 할아버지를 살해한 장삼봉의 제자를 살해하고 무려 십수년 째 척사광(한예리 분)이라는 이름은 그저 전설로만 떠돌 뿐이었다. 그 뒤로 누구와도 겨룬 적이 없었고, 더구나 이방지(변요한 분)와 같은 고수와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워 본 적도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싫다고 굳이 칼등으로 치는 수고를 감수하는 것도 한 번도 목숨을 위협받아 본 적이 없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방지와 싸우면서도 스스로 말하고 있었다. 이방지가 너무 강해서 그의 목숨까지 돌보며 싸울 자신이 없다.
이방지도 그렇고 무휼(윤균상 분) 역시 단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좋아서 굳이 살릴 수 있는 사람까지 일부러 죽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죽일 수 있을 때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는다. 당장의 사소한 배려나 인정이 자칫 치명적인 위협으로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날선 경계에서 찰나의 선택에 여유를 남길 만큼 한가롭지 않았다.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그 차이가 결국 승부를 갈랐다. 배에 칼이 박히고도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물고 고통을 이겼던 이방지와는 달리 그리 깊지 않은 상처에도 척사광은 못견뎌 했었다. 망설임이 있었다. 이방지라는 강적을 앞에 두고도 오로지 이겨야 한다는 한 가지 목적에만 집중하지 못했었다. 체력의 열세는 그 틈을 더욱 벌리고 있었다. 그러고도 겨우 무휼이 몸을 날려 함께 절벽으로 떨어지고서야 이방지는 살아날 수 있었다.
압도적이었다. 원래는 일찌감치 승부가 끝났어야 했다. 몇 합 겨루기도 전에 벌써 이방지의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칼이 부딪힐 때마다 상처가 늘어나고, 심지어 몸에 칼까지 깊숙이 박히고 있었다. 이길 수 없다. 이대로라면 무휼의 말처럼 이방지는 척사광에게 죽게 되다. 그때 척사광이 가진 인간의 약점이 모습을 드러낸다. 실전경험이 부족하고 체력이 약하다. 그 약점을 이용해서 이방지는 시간을 끌고, 때마침 나타난 무휼은 이방지를 위기에서 구한 뒤 무휼과 함께 절벽에서 몸을 날린다. 실력에서도 밀리고 승부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상당히 절묘한 절충이고 타협이다. 다만 어째서 무협에서 고수가 싸울 때면 항상 바로 옆에 절벽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무휼과 척사광의 인연도 계속 이어지려는 듯하다.
과연 이제까지와 전혀 다르면서 단연 압도적인 선죽교 장면이었다. 이방원과 정몽주가 나누었다는 '하여가'와 '단심가'가 서로의 논리로써 선죽교 위에서 부딪힌다. 대세를 쫓아 부귀와 영화를 누리자는 '하여가'가 사직이든 왕실이든 그 어떤 명분이나 대의든 당장의 자신의 삶과 행복 위에 두지 않으려는 백성의 무심함을 담아낸다. 그에 대한 정몽주의 답이 백성을 일방적으로 쫓지 않으면서 그들을 품고 이끌어야 하는 유자의 도리다. 충은 그같은 유자의 중심이다. 충성이란 이타다. 자신을 버려 타인을 지키고 이롭게 하는 것이다. 가치를 지키고 정의를 지킨다. 그것을 같은 유자로써 이방원은 이해한다. 더욱 가지고 싶고, 그래서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난다. 차라리 이렇게까지 자신들을 거부하는 정몽주를 원망하게 된다. 악명으로나마 역사속에 이방원과 정몽주는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천 년의 이름을 얻는다. 이름을 버려 고려의 천 년을 얻고자 했지만 결국 자신의 죽음과 함께 고려의 역사는 끝나고 대신 고려의 마지막 신하로써 그 이름을 역사에 남긴다. 역사에 만일은 없다지만 혹시라도 당시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지 않고 살아 끝끝내 이성계와 정도전을 막아냈다면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정도전과 조준을 죽이고 그들이 추진하던 개혁정책마저 모두 좌절시켰더라면. 정도전은 살아서 마침내 조선을 건국한 혁명가로 다시 평가받게 되었고, 정몽주는 죽어서 마지막까지 고려왕조를 지킨 충신으로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역사에서 영원을 얻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일 터다. 지금 자신의 매순간순간이 평가받고 인상으로 기억으로 이어진다.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마침내 이방원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정도전에게 정면으로 반발한다. 처음부터 정도전의 혁명에 자신의 자리는 없었던 것이 아닌가. 무명의 존재가 미미하다. 겨우 서너발짝 떨어져서 방관하고 비평하느 것이 고작이다. 정몽주와 공양왕 다음은 무명이다. 이방원과 정도전 사이의 틈을 무명이 노린다. 정몽주마저 사라진 고려에 더이상 희망이란 없다. 아직 척사광이 남아 공양왕에게 돌아가지 않고 무휼과 함께 있다. 조선이 건국되고 이제 다음 싸움을 준비해야 한다. 피로감마저 느낀다. 마치 시간이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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