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꿰뚫는다. 그래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그러고 싶은 것인가. 옳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려 한다. 양심에 의한 도덕적 사명이며 의무인가, 아니면 단지 개인의 감정과 충동에 따른 욕망이고 집착에 지나지 않는가. 수미상관하듯 그같은 이방원(유아인 분)의 일갈은 정도전(김명민 분)의 요동정벌을 통해 절정에 이르게 된다. 과연 정도전이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만들자면서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갈 전쟁을 계획하느 것은 어떤 의도에서인가. 이상이고 신념이지만 결국 정도전 개인의 욕심이고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백성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지키는 전쟁이라면 침략자들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이라도 있다. 오히려 그런 경우라면 굳이 그러라고 시키지 않더라도 백성들 스스로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침략자들과 싸우려 한다. 그러나 땅을 얻기 위한 전쟁은 다르다. 단지 지배자들에게 다스릴 영토만 조금 더 늘어날 뿐이다. 세금을 걷고 병사로 징집할 수 있는 백성만 더 많아지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어떻게 백성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것인가. 어차피 대부분의 백성들은 오늘을 살기도 버겁고 벅차기만 하다. 만에 하나라도 전장에서 죽거나 다치면 고향에 남은 가족들을 부양할 사람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대제국을 건설했던 고대로마와 당나라에서 정작 그 주역이던 시민과 농민들이 몰락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고대로마의 시민들은 자유민이면서 자영농이었다. 당나라의 균전제는 모든 농민에게 골고루 경작할 땅을 나누어주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고대로마와 당나라에서 이들은 제국의 영광을 이루어줄 군사력의 핵심이기도 했었다.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에 의해 징집되어 무장을 하고 전장으로 보내졌다. 전장에 나가 있는 동안 이들은 자신의 농사를 돌보지 못한다. 죽거나 다치면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노동력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한 수준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조금씩 누적되는 사이 어느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나라는 부강해졌지만 정작 그 주역이던 백성들은 그 과실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다. 로마제국의 전성기 시민군의 주축이던 로마의 시민들은 제국이 베푸는 배급과 유흥에 기대어 사는 도시빈민으로 전락해 있었다. 설사 정도전의 계획대로 요동정벌에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절망이나 안기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야마로 이상이다. 몽상이다. 망상이다. 그 지점에서 정도전의 이상은 이방원의 야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무명 역시 처음으로 대의로써 정도전과 정확히 대칭점에 서게 된다. 백성들의 삶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도전을 막아야만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안녕과 안정을 위해서라도 정도전이 추진하려는 요동정벌의 계획을 좌절시켜야만 한다. 이방원의 개인적 야망에 백성과 나라를 위한 대의가 더해진다.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도 반드시 자신이 정도전을 제거하고 그의 무모한 계획을 막아내고 말겠다. 이제는 오히려 이방원의 행동이 대의가 되고 정도전의 행동은 대의를 해치는 사욕이 된다. 과연 대의와 사욕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쩌면 이방원의 말처럼 현실에 이루어진 결과로써 대의와 사욕을 나누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옳다면 대의이고, 몇몇 개인들에게만 옳다면 욕심이고 집착이다. 기가 막히게도 그같은 반전이 궤변과도 같던 이방원의 항변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사병을 빼앗길지 모른다. 사병마저 빼앗긴다면 자신의 야망을 이룰 모든 수단을 잃게 된다. 절박하다. 그같은 절박함이 정도전이 경고한 그의 독수를 급하게 쫓도록 만든다. 무엇일까. 무엇을 의도하고 무엇을 계획하고 있는 것일까. 정보의 차이였다. 정도전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방원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명황제 주원장의 상태가 위독하다. 아무래도 오래살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어쩌면 이미 죽은 뒤인지도 모른다. 주원장의 뒤를 이을 새황제 주윤문은 아직 어리고, 새황제를 위협할 수 있는 주원장의 다른 아들들은 각각 왕으로 봉해져 자신의 영지에서 상당한 세력을 보유한 상태다. 주윤문이 숙부들을 의심하지 않고, 숙부들이 황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는 이상 대륙에서는 반드시 내전이 일어나고 만다. 조선이 요동을 가지고자 한다면 유일한 최선의 상황이 이제 곧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허패가 더이상 허패가 아니게 된다. 조선에게 기회이며 한 편으로 위기다. 이방원은 고민한다. 이대로 정도전과 함께 요동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정도전을 꺾고 조선에 안정을 가져올 것인가. 그만큼 아직도 이방원은 정도전의 나라 조선을 사랑하고 있다.
정도전의 계획을 뒤쫓는 이방원의 모습과 아무도 모르게 요동정벌의 계획을 추진하는 정도전의 모습이 번갈아 교차한다. 정도전이 요동정벌의 계획을 구체화하여 이성계(천호진 분)에게 보고하는 순간에는 무명이 이방원을 상대로 그 역할을 대신한다. 같은 사실에 대해서도 해석이 전혀 다르다. 같은 사실을 두고서도 전혀 다른 결론을 내린다. 반드시 요동을 정벌할 것이다. 정벌할 수 있을 것이다. 요동을 정벌하는 것은 곧 패망으로 이르는 길이다.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고통받게 될 것이다. 아니 설사 성공하더라도 고통받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성계가 결정해야 하듯 이방원 역시 결론을 내려야 한다. 왕이 된다. 스스로 왕이 되어 나라와 백성의 내일을 결정한다. 절묘한 연출이다. 마치 역사의 긴박함이 그 짧은 시간 안에 압축해서 흐르는 것 같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어떻게 결론지을 것인가.
사실 무명의 분석에도 오류는 있었다. 아무리 세력이 강해봐야 주체의 세력권이란 하북과 요동 일대에 불과했었다. 새황제 주윤문은 말 그대로 명제국의 힘 모두를 동원해 쓸 수 있었다. 실제 주체가 반란을 일으킨 뒤에도 여러차례 황제군을 패퇴시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전력의 차이로 결정적인 승리까지는 거두지 못했었다. 만일 소하에서 주윤문이 잘못된 정보로 오판만 하지 않았다면 주체는 그대로 역사의 수많은 실패한 반역자들처럼 몰락하여 죽임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역사에는 만일이란 없다. 어쩌면 불가능할수도 있었던 그 작은 빈틈을 비집고 상황을 역전시키고 금릉을 급습하여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것은 오로지 주체 개인의 실력이었었다. 다만 과연 내전이 일어나기도 전에 주체가 먼저 금릉을 공격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예측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는한가. 주체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주윤문의 측근들이 지나치게 형제들인 여러 왕들을 압박하며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주체를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다. 후대에 쓰여진 역사드라마가 흔히 범하는 오류다. 결과에 원인과 과정마저 모두 끼워맞춘다. 하기는 그동안도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여전히 이방원은 분이(신세경 분)를 사랑한다. 분이 역시 이방원을 좋아한다. 하지만 신분이 다르고 서로 가는 길이 다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분이를 떠보고 이용한다. 분이가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분이가 있는 반촌에 자신의 사병들이 쓸 무기들을 숨겨둔다. 만남은 달콤하지만 헤어짐은 씁쓸하다. 자신에게도. 상대에게도. 형제조차 의붓어머니조차 이방원에게는 이미 적이다. 아버지를 거스르고 스승을 쫓는다. 이제는 정도전을 죽여야 한다. 비정한 권력의 길이다. 그것을 한탄하고 스스로 비웃으면서도 결국을 그 길을 쫓을 수밖에 없는 것이 권력의 숙명이다. 만남에는 끝이 있다. 인연에도 마지막이 있다. 분이는 선택했고 이방원은 행동한다. 어떤 결말이 찾아올 것인가.
과연 척사광(한예리 분)이 이방원의 아내 민다경(공승연 분)이 감춰둔 무기들을 살펴본 것은 어떤 의미인가. 여전히 척사광은 이방지(변요한 분)와 무휼(윤균상 분)을 훌쩍 뛰어넘는 최강의 고수다. 이대로 아무일없이 반촌에 묻혀 있을 수만은 없다. 무기창고 앞에서 무휼과 척사과이 마주친다. 그 모습을 하필 갑분(이초희 분)이 목격한다. 정도전의 밀본 역시 분이 옆에 자신들의 사람을 심어두고 있었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을 돕던 반촌의 도담댁을 떠올리고 만다. 정도전의 동생 정도광을 찾아가 보고를 한다. 어떤 이들은 그저 가만히 있으려 해도 주위가 그들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는다. 역사의 한가운데 서있는 죄다.
이방지와 연희(정유미 분)의 사이가 다정한 것이 어쩐지 불길하다. 하기는 불길할 것도 없다. 전작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써 시작한 작품이다. 이방지의 수십년 뒤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방지와 연희의 미래도 결정되어 있다. 그런 연희를 정도전은 안쓰럽게 바라본다. 자유롭기를 바란다. 자신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이미 한 번 거절했다. 이방지와 함께하기에 이 위험한 일도 그저 즐겁고 행복하다. 예정된 시간이 다가온다. 그래서 더욱 희롱하듯 그들의 사이는 더 다정하고 더 행복하다. 비극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벌써부터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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