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지구위에는 수십억의 사람이 살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검고 어떤 사람은 머리가 붉다. 피부가 흰 사람도 있고, 눈동자가 회색인 사람도 있고, 키가 작거나, 살이 쪘거나, 등이 굽었거나, 수십억의 인구만큼 수십억의 서로 다른 개성들이 공존하고 있다. 차라리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이해하기란 쉽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종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개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따라서 그만큼 어렵다. 인간이란 이런 존재라 하지만 결국 각각의 인간들은 그만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현실에서 차별이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경험과 학습을 통해 인간이라는 집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이해도 하고 있다. 세계가 보편화되고 있기도 하다.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인종과 국가, 민족, 지역들이 세계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간이라는 종 안에서 개인들은 각각 크든 작든 다른 개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각각의 카테고리 안에서 다시 개인을 별개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복잡하고 어렵다. 더 쉬운 방법을 찾으려 한다.
이를테면 시험문제를 푸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시험이란 수험자가 출제자가 가지고 있는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출제자는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답에 이를 수 있도록 고려해서 문제를 출제하면 된다. 그러면 수험자는 오로지 출제자의 의도를 헤아려 그 답을 찾아내야만 한다. 일방적인 관계에 있다. 나는 답을 가지고 있다. 상대가 자신의 답을 내놓았다. 자기가 가진 답과 상대의 답이 서로 다르다. 자신의 답이 옳다면 상대의 답은 틀린 것이다. 점수는 그에 대한 책임이다. 답을 맞추지 못했다면 필요한 점수를 얻지 못하고 그 결과 자기에게 불이익으로 돌아간다. 출제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물론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당장 상대와 내가 대등한 위치에 있다면 그같은 일방적인 관계를 납득할 사람이 거의 없다. 어찌되었거나 상대보다 우위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신의 이상을 강요할 수 있다. 자식의 행동을 강제할 수 있는 수단을 부모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에게는 그런 것이 없기에 설사 바라는 것이 있더라도 일방적으로 부모의 선의에만 기대는 수밖에 없다. 혹은 선생님과 제자이고, 상사와 부하이며, 보다 우월한 존재와 열등한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차별이다. 사회적인 위치와 역할을 정의하여 일방적으로 강요한다. 그와 다르면 가차없이 응징을 가한다. 심지어 선의이기까지 하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바른 답으로 이끌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이다.
현실의 상대의 존재는 없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이 만들어낸 이상적인 이미지를 투사하는 대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오로지 하나의 답만이 존재하는 객관식이다. 하나의 답으로 상대를 정형화한다. 혹은 남자니까. 혹은 여자니까. 흑인이니까. 백인이니까. 유대인이니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백인우월주의자라고 모든 유색인종을 혐오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착하고 예의바른 유색인종은 좋아한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아서 행동할 줄 아는 유색인종을 싫어할 이유란 없다. 유색인종들을 싫어하는 것은 대부분의 유색인종들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성이란 원래 이래야 하는데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김치녀가 되고 된장녀가 되고 삼일한의 대상이 된다. 현실을 이상화된 이미지가 이긴다.
제대로 된 여성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개념있는 남성이라며 이와 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여성주의자라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안되었을 것이다.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와 같은 행동도 스스로 판단해서 할 수 있는 독립된 존재로서가 아니다. 그저 자신의 이상을, 자신의 기대와 바람을 투사하는 대상으로서다. 어차피 모두는 시시한 인간들이다. 시시하다는 것은 모두가 서로의 이상에서 벗어나 불편하게 존재하는 개체라는 뜻이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똥도 싸고 토하기도 한다. 고양이는 당연히 시끄럽게 울고 똥도 싸고 털도 지독하게 날린다. 그렇다고 울지도 말고 똥도 싸지 말고 털도 날리지 말라면 고양이가 아닌 다른 동물과 함께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차별은 정의롭다. 대개는 선의로 이루어진다. 매우 논리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자신의 논리다. 자신의 사정이고 자신의 상황이다. 정확히 나라면 이렇게 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보고 듣고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와 다르다. 그와 틀리다. 차라리 침착하고 냉정해서 섬뜩하기조차 하다. 진짜 상대가 틀렸다 생각한다. 그러므로 상대에 대한 모든 혐오와 증오는 정당하다. 응징 역시 정당하다. 이유가 있다. 근거가 있다. 모든 악의에는 선한 동기와 이유들이 있다. 새삼 깨닫는다. 진짜 생각있는 여성이라면 그래서는 안된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지 않는다.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조건들이 인간이게 만든다. 시험처럼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비겁한 것이 인간이다. 욕망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본능과 욕망에 지고, 인정과 사정에 이끌린다. 그런 것들까지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원래 인간이란 그런 존재다. 여성이란, 남성이란, 혹은 특정한 어떤 조건들에 대해서. 그러므로 나아가려 한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려 한다. 대단한 인간이 아닌 시시한 인간들이기에 더욱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보다 나아지려는 노력을 함께한다. 공존이란 존중이다. 대수롭지 않아도 인간이기에 존중하고 인정한다. 인간은 단지 인간일 뿐이다.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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