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저글러스 - 쓸데없은 자부심, 사명감, 충성과 노력의 대가

까칠부 2017. 12. 6. 09:31

원래 자기 업무에 대한 자신감이나 사명감 같은 것은 관리자급 이상이 되고 난 다음에 가지는 것이 좋다. 그래도 어느 정도 부리는 입장이 되어야 그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지 부림당하는 처지에 괜한 오만이고 자만이다. 하긴 임원급이라 해도 결국 쓸모없어지면 버려지는 것은 크게 차이가 없을 테지만 말이다.


비서로서 자기가 굉장히 뛰어나다 생각했다. 인정받고 신뢰받고 있다 생각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될 것이라고. 반드시 자기라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수고했다는 한 마디로 버려지고 다시 수고했다는 한 마디로 내쳐진다. 필요없어지니 잘라내고 필요없다고 아예 거부한다. 변명조차 들어주지 않는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나마 자기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냥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앉아만 있으라. 그러면 또 시키는대로 해야만 한다.


비서 이야기라기보다는 직장인 이야기다. 예전과 다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하지만 IMF를 거치면서 많은 직장인들이 깨닫게 되었다. 나는 회사의 일부조차 아니다. 필요없어지면 아무렇게나 - 심지어 폭력을 휘둘러 내쫓을 수 있는 그냥 수단이고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기에게도 회사는 단지 수단이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회사에서 부담된다고 일정 연차 되면 알아서 잘라내고, 그 전에 자기가 능력 있으면 회사 그만두고 더 나은 길을 찾아 나서고. 정상이기는 한데 씁쓸하기는 하다. 하필 불륜이라는 더러운 딱지만 붙지 않았어도 좌윤이(백진희 분) 역시 다른 회사에 자리를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그래서 불륜이었던 모양이다. 비서로서 좌윤이의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녀를 궁지로 몰 이슈가 필요했다. 그나마 불륜이라면 상사 부인의 터무니없는 오해였다며 동정하고 넘어갈 여지가 있다. 그런 그녀의 옹색한 처지를 이용하려는 이들마저 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그래도 비서인데 자기 보스의 비밀을 몰래 알려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러니까 그런 처지가 되고 나니 조금은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봐야 할 것이다. 더이상 상사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바치기보다는 자기가 살 길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일단은 번호를 저장한다. 그 제안에 응할 것인가는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다.


참 비참하다. 이용만 하고 불리해지니 무심하게 저버린 놈도 문제지만 아예 기회조차 주지 않고 냉정하게 쳐버리려는 놈은 더 잔인하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애정도 확신도 없는 것인지 모르겠다. 자기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에 저렇게 무심할 수 없다. 인간은 타인에 자신을 투영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무한히 이기적인 이들도 마냥 이기적이기만 할 수는 없다. 아버지 제사마저 잊으며 일에 충실했던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인가. 그동안 비서로서 경험과 실력을 쌓아온 대가가 이런 것인가.


억울하게 예쁘다. 수수하게 예쁘다. 어차피 모니터 너머로 보는 배우에게서 체온까지 기대할 수는 없다. 그 내면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백진희라는 사실에 안심했다. 남치원(최다니엘 분)의 캐릭터는 여전히 평면적이다. 아무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잘생기기는 했다.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