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까지 유럽에서 법이란 단지 군주 개인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었다. 군주의 명령이 곧 법이었다. 군주가 서명하면 그 순간 법으로서 효력을 가지는 것이었다. 세금을 더 걷고 싶으면 그렇게 법으로 정하면 되는 것이고, 누군가 죽이고 싶으면 역시 마찬가지다. 짐이 곧 국가다. 군주가 곧 법이다.
법의 공정함이란 근대가 만든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조차 대부분의 시대에는 차라리 사치였었다. 하긴 이승만이 조봉암을 죽일 때도 재판이라는 형식을 거쳤고, 박정희가 인민혁명당 관련자들을 사형에 처한 것도 당시의 법에 따른 판결이고 집행이었었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법을 어기고 이용하는 것은 그나마 법을 만드는 것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비할 수 없이 적다. 법을 만들고, 법을 준용하고, 법을 집행하고, 법을 도구로 삼는 자들이야 말로 가장 사회에 위협이 되는 해악일 것이다.
어째서 하필 차문숙(이혜영 분)은 판사였을까. 어쩌면 지금 대중이 가지는 법 - 정확히는 법을 집행하는 이들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아니었을까. 아주 오래전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자살했던 이강헌이 아니더라도 돈과 권력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낮고 약한 이들 앞에서는 끝없이 가혹해지는 법에 대한 원망이고 분노였을 것이다. 같은 검사출신이라고, 같은 판사 출신이라고, 사회적으로 대단한 지위와 명성과 권력과 부를 누리고 있다고 법은 한없이 관대해지는 한 편,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가난에 떠밀려 약간의 물건만 훔쳐도 여지없이 엄격한 판결이 내려지기도 한다. 법은 누구의 편인가. 법의 정의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비단 차문숙만이 아니다. 법복을 벗고 나서를 생각한다. 법복을 벗고 나서 무엇을 해서 먹고 살까. 법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가족은 또 어떻게 책임져야만 할까. 그러기 위해 사법시험도 본다. 법과 정의를 위해 사법시험을 치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높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지기 위해서. 가족까지 그것을 바란다. 과연 국정농단으로 재판정에까지 서게 된 우병우에 대해 그 부모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부끄럽게 여기고 있을까?
그런 법이 지배하는 사회다. 피의자로 재판정에 섰어도 같은 검사이기 때문에 끝없이 약해져야 하고, 같은 검사출신으로 피의자가 더 당당해질 수 있는 그런 질서가 아예 법처럼 정착된 사회다. 법은 정의롭고 공정하지만 다만 법을 판단하고 집행하는 자신에게만은 아니다. 법은 자신을 위한 수단이지 자신이 섬겨야 할 목적이 아니다. 그동안 변호사에게만 그 모든 책임이 가해지고 있었지만 결국 진짜는 검사이고 판사였다. 사실 더 악랄한 것은 검사지만 결국 마지막에 판결을 내리는 것은 판사였다. 안타깝게도 그나마 법에 대한 신뢰를 담보하던 판사들마저 단지 약한 인간들임을 직접 보고 듣고 깨닫게 된 터였다. 법은 결코 이 사회의 정의를, 질서를, 개인의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악랄한 범죄의 뒤에서 그를 비호하는 역할을 한다.
변호사의 앞에 무법이 붙는 이유다. 굳이 굳셀 무武를 붙여 무법武法이라 쓰고 있지만 실제는 없을 무 무법無法임을 보는 시청자 대부분이 알고 있다. 어째서 이 사회의 법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차라리 불법적인 수단으로 그 법을 심판하고 응징해야 한다. 통쾌하지만 씁쓸하다. 대중문화로 보는 이 사회의 단면이다.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법변호사 - 허구같지 않은 익숙한 현실 (0) | 2018.05.27 |
---|---|
미스 함무라비 - 법에 대한 비관과 낙관, 그 절묘한 조화와 대비 (0) | 2018.05.23 |
나의 아저씨 -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웃으며, 사람과 인연의 의미 (0) | 2018.05.18 |
나의 아저씨 -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어느 아저씨의 성장기 (0) | 2018.05.17 |
무법변호사 - 벌써부터 드러나는 진실, 명쾌한 쌈마이 (0) | 2018.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