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유진의 물음과 고애신의 절망, 그들이 사랑한 시대를 위해서

까칠부 2018. 8. 6. 08:02

엄밀한 의미에서 한반도인들이 조선의 백성이 아닌 조선인이라고 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확고히 가지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3월부터였다. 맞다. 3.1운동이다. 3.1운동이 가지는 중요한 역사적 의의 가운데 하나다. 이전까지는 그저 양반이고 상민이고 천민이었던 이들이 침략자인 일본의 일방적인 약탈에 똑같은 피해자가 되면서 양반도 상민도 천민도 아닌 조선인으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양반인 이들이 있었고 차라리 일본인이고자 했던 이들도 있기는 했었다.


조선은 양반의 나라다. 양반을 중심으로 한 반상의 신분질서가 지배하는 나라다. 이제껏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았다. 그저 가까운 이들 가운데 양반인 할아버지가 있었고, 상민인 장포수가 있었으며, 천민인 노비였다가 노비가 해방되며 고용인으로 남게 된 함안댁과 행랑아범이 있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진 그들과의 관계마저 신분에 의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높은 신분의 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장포수는 잔인했다. 한 순간에 스승으로서가 아닌 상민 장포수로 돌아가 고애신(김태리 분)이 가진 신분적 위치를 자각시킨다. 지금 이것이 조선이 허락하는 자신과 고애신과의 관계다. 그러니 포기하라. 신분이란 한 편으로 책임이고 의무이기도 했다.


유진 초이(이병헌 분)의 고백에 놀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유진이 노비의 신분이어서 놀란 것인지 유진이 들려준 믿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과거 이야기에 놀란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유진의 부모를 죽이고 유진으로 하여금 한을 품고 조선을 떠나게 만든 같은 양반의 신분으로서 가지는 죄책감일 수도 있다. 지금 자신은 유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유진의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가. 자신이 지금 지키고자 하는 조선에 유진과 같은 노비는 살 수 있는가. 구동매(유연석 분)와 같은 백정도 함께 어울려 살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여전히 노비이고 백정일 뿐인 것은 아닌가. 그러면 자신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조선이 정작 눈앞의 사내에게 어떤 의미일 것인가. 그보다는 동지로서 같은 곳을 보며 나란히 함께 걸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깨진 것에 대한 실망이었을 수도 있다. 그에게 자신과 같은 길을 강요할 수도 강요해서도 안된다.


유진에게는 유진의 길을, 그러나 자신에게는 자신의 길을. 어렵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무모한 싸움에 뛰어든 순간 자신의 끝은 예정되어 있었다. 이길 수 없다면 죽을 뿐이다.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디선가 쓸쓸한 주검으로 나뒹굴 뿐이다. 그런 각오가 그런 자신의 고민마저 사소하게 여기도록 만든다. 나름 유진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다. 자기를 기다리지 않기를. 자기로 인해 괴로워 하지 않기를. 사실 유진이 바라는 것은 고애신의 고민도 고통도 모두 함께하는 것이었을 테지만. 그것이 유진을 오해하게 만든다. 고애신이 노비라는 자신의 신분을 꺼려해서 자신을 멀리하고 있다. 하지만 운명보다 작가의 의도가 유진을 그대로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라면 하필 아무도 없는 눈오는 거리에서 두 사람이 또 우연히 마주칠 리 없었다.


누구를 위한 나라인가? 누구를 위한 조선인가?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조선은 어떤 조선이며 무엇을 위해 그 조선을 지키고자 하는 것인가? 하긴 지금도 쉬운 질문은 아니다. 누구나 쉽게 말한다. 국민을 위한 국가, 국민에 의한 국가, 무엇보다 국민 자신의 국가. 하지만 바로 그 국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있어왔고 지금도 어딘가에는 있다. 나라경제를 발전시키겠다고 빛도 들지 않는 먼지구덩이에서 하루 20시간 넘게 일하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10대 소녀들이 있었다. 영양실조로 키도 작고 등도 굽어서 하얗고 볼품없던 수많은 누나들 언니들 그리고 지금은 누군가의 어머니들이 있었다. 손발이 잘려나가도 보상 한 푼 받지 못하고, 생목숨을 잃어도 무심히 잊혀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조선을 구한다. 나라를 구한다. 고애신의 고민은 이제 시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나라를 지키겠다고 일어난 의병 가운데서도 신분의 차이는 명확했었다. 양반과 상민의 구분으로 인해 의병 내부에 분열이 생기기도 했었다. 벌써 당시 조선이 그 물음에 답할 수 있었더라면. 일본으로부터 지켜낸 조선에 어떤 사람들이 살아갈 것인지 답을 내릴 수 있었더라면. 일본의 침략이 현실이 되고서야 비로소 많은 조선인들은 자신들이 조선인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여전히 백정은 백정일 뿐이었지만 그마저 한국전쟁으로 모든 것이 혼란스런 가운데 신분의 구분마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이제 대한민국에는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신분만이 남아 있다. 위정자들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수많은 상민 천민들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구동매도 물으려 한다. 죽이겠다는 것이든 살길 바란다는 것이든 모두 자신을 한 인간으로 정면으로 마주하며 한 말이다. 그마저 구동매를 기쁘게 한다.


낭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냉혹한 현실도 있다. 외세로부터 침탈당하는 조국과 그럼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그 조국의 모순이 있다. 개인의 힘으로는 그 조국을 구하는 것도 버겁기만 하다. 조국을 구하면서 부당하고 부조리한 현실의 모순들과도 싸워야 한다. 아니면 도망치거나. 고애신의 신념과는 어긋나지만 지금으로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해피엔딩이다. 어쩌면 그 조국마저 적이 될 수도 있다. 사랑하려 하고 그 사랑을 지키려 한다면 조국과도 싸워야 하는 때가 올 수 있다. 물론 아직 남은 미래의 일이다. 지금 당장은 하나에만 집중하려 한다. 시린 외로움과 상처를 보듬으며. 그들이 만난 시대는 그렇게 잔인하다.


뜻밖에 호흡이 느린 편이다. 대하역사드라마가 아니다. 역사의 서사보다 개인의 사정에 대한 묘사에 더 집중한다. 그런 시대의 한 가운데서 개인들은 어떻게 어떤 감정으로 세상을 보고 서로를 느끼며 살았는가. 같은 사랑이라도 시간과 공간이 달라지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과감하면서 한 편으로 발칙하기도 하다. 역사를 단지 주인공들의 사랑을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그런 느낌마저 받는다. 역사마저 주인공들의 사랑을 그려내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한다. 그렇게 그들은 간절히 아름답게 사랑했다. 영상이 아름답다.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