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 시대에 떠밀리는 자들과 시대의 낭만

까칠부 2018. 8. 5. 07:04

그러고 보면 구동매(유연석 분)나 유진 초이(이병헌 분)나 쿠도 히나(김민정 분)나 자기들이 선택한 삶이 아니었다. 원해서 일본인이 된 것이 아니었다. 원해서 미국인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신분이 그랬고, 당시 상황이 그랬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떠밀려서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 뿐이었다. 그나마 쿠도 히나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아버지의 강요로 일본인의 처가 되어야 했었다.


구동매가 김희성(변요한 분)에게 묻는다. 왜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가. 그래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나뿐인 목숨마저 기꺼이 내던지려는 한낱 물장수의 모습을 보고서 그리 물은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자기에게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적대하는 일본인이 되어 그들을 잡아 베어야 하는 입장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온전한 조선인인 - 그것도 내로라하는 부유한 가문의 자손인 김희성이라면 자기와는 많이 다르지 않았겠는가. 한 편으로 부러움이고 한 편으로 질투였으며 그래서 한 편으로 경멸이었다. 왜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가. 그리고 한 편으로 자신에 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고애신(김태리 분) 한 사람 뿐이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온전한 양반의 자식도 아니었다.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부모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약혼자마저 벌써 몇 년이나 자신을 저버린 채 타지를 떠돌고 있었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역사를 바꾸는 주역들은 그런 주변과 경계에서 많이 나타난다. 무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사가 아닌 것도 아니다. 지켜야 할 기득권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잘만 하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을 노려볼만한 위치에 있다. 아예 신분이 비천하면 세상을 한 번에 뒤집어야 하지만 주변과 경계라면 단지 세상을 조금 바꾸는 정도로 충분하다. 같은 양반이고 명문가더라도 남자인 김희성과 여자인 고애신에게 지워지는 책임의 무게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었다. 정확히 선택하려 하고 있었다. 시작은 자기가 선택할 수 있어도 그 끝마저 자기가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앞에서 고작 자기 한 사람의 힘이란 너무 무력할 뿐이었다. 조선을 노리고 있는 제국주의 열강의 힘 앞에서 총 좀 쏠 줄 안다고 자기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 자신의 삶일 테니까. 그래서 안된다면 기꺼이 실의한 채 죽어주면 되는 것이다. 끝내는 좌절하고 말지라도 그래서 죽는 순간 자신의 삶에 후회만 없으면 되는 것이다. 죽는 것은 두렵지만, 당연히 자기 목숨은 소중하지만, 그런 삶이라면 충분히 가치가 있을 것 같다. 하긴 김희성에게는 가문의 종손으로서 부모의 기대부터 너무 지워진 것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삶이기에 사랑마저 자기가 선택한다. 가문이 정한 약혼자가 있다. 조선의 전통과 관습이 가리키는 올바른 아녀자의 삶이란 것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자기 목숨도 내던졌는데 고작 그런 것들에 자신을 얽매려 할까. 근대적인 개인이라는 것이다. 가문도 신분도 아닌 오롯한 존재로서의 자신이다. 그렇게 명문가의 애기씨가 아닌 고애신이라는 개인으로서 고애신은 김희성과 만나고 유진 초이와도 만난다. 어쩌면 세상에서 단 두 사람, 아니 구동매까지 명문가의 애기씨가 아닌 여성이며 개인으로서 고애신을 대해주는 사람들일 것이다. 한 사람은 친구가 되고, 한 사람은 연인이 되고, 그러면 남은 한 사람은 무엇이 될까?


유진이 묻는다. 나는 노비다. 당신이 구하려는 조선에 자신과 같은 노비도 존재하는가? 어쩌면 어리석은 물음인지 모르겠다. 이미 달라진 세상을 인정하고 멸시하던 중인출신의 이완익(김의성 분) 앞에서 무려 조정의 외무대신인 이세훈(최진호 분)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어차피 노비나 포수나 천한 신분이기는 마찬가지다. 고애신의 스승이 바로 장포수였다. 장포수는 내내 고애신에게 하대하며 고애신은 그를 스승으로서 예우한다. 어쩌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최초의 신여성인지도 모르겠다. 진정으로 고애신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여전히 자신은 명문가의 애기씨 고애신인가, 아니면 온전한 자유인 고애신인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짧지만 화려하고 고결한 삶처럼.


유진의 복수가 일단락된다. 우연히 손에 넣은 은행증서를 이용해서 이세훈을 대상으로 함정을 판다. 유진이 계획한 함정을 실천에 옮긴 것은 장포수가 포함된 의병의 결사였다. 신분이 낮은 주변사람들을 쉽게 무시하고 멸시하며 도구로 삼는 이세훈의 습성이 그 틈을 만들었다. 이완익에게 선물로 넘기려던 애첩이 도망치고 애첩마저 무시하며 애지중지하던 도자기에서 고종이 그토록 애타게 찾던 증서가 나왔다. 고종을 묘사하는 배우 이승준의 연기가 흥미롭다. 마치 주위와 단절된 듯 자기 일이 아닌 듯한 철저하게 절제된 감정이 어쩌면 왕이란 이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한다. 군림하는 자로서 자신을 배반한 신하를 처단하는 것도 의무이고 업무일 뿐 분노를 내비칠 일이 아니다. 그저 무심하게 죽이라. 감독의 주문이었을까?


시대가 달라졌다. 세상이 달라졌다. 그래서 고민한다. 그래서 혼란에 빠진다. 아래가 위가 되고, 왼쪽이 오른 쪽이 되고, 어제까지 옳았던 발랐던 일들이 잘못된 것이 된다. 그래서 더 선택을 고민한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바른 길인가. 자신은 이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 더욱 강요된 삶을 살아왔던 이들이기에. 강제되었던 삶을 살아야 했던 이들이었기에. 그런 가운데 오롯이 벌써부터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이가 있다. 그를 닮고자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선택하려는 이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남겨진다. 시대처럼. 빠르게 달려가는 시대는 멈춰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참 염장이다. 오히려 근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현대물이었다면 너무 낯간지러워 차마 보고 있기도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 낭만이 있었던 시대다. 하기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거는 자체도 하나의 낭만일 수 있을 것이다. 필생의 숙적과 더불어 더 큰 세상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도 하나의 멋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고애신의 삶은 멋있다. 물론 배우 김태리도 멋있다. 바로 낭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