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 오래된 책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르게 읽힐 때

까칠부 2019. 2. 24. 10:36

가끔 책을 사다 보면 표지에 드라마에서처럼 스티커가 붙어 있을 때가 있다. 당연히 안다. 뭔가 실수가 있었구나. 뭔가 인쇄가 잘못되었구나. 그런데 그 스티커들이 붙기까지 아마 출판사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모두가 당황하고, 혼란에 빠지며, 대책을 찾아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경력이란 게 사실 이런 것이다. 일의 경중을 안다. 뭐가 중요하고 뭐가 중요하지 않은 지 않다. 무엇을 우선하고 무엇이 나중인가 판단할 줄 안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나중 문제다. 아니 바로 그런 것들을 바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 일을 잘한다는 것이다. 아직은 출판이라는 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니까. 책임감이나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기에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전혀 알지 못한 채일 테니까.


그래도 스티커 하나라고 끝난다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무려 5천 부다. 그 5천 부의 책을 찍기 위해 들어간 종이며 잉크며 그동안 들인 사람들의 노력은 어떻게 되는가. 문제는 그 책임의 무게마저도 아직 느낄 수 없는 생초짜라는 것이다. 출판 일을 하고 싶어서 들어간 것도 아니고 출판사의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냥 막연히 아무데라도 취직해야겠다고 들어갔다.


오랜동안 한결같던 책이 어느 순간 전혀 다르게 읽힌다. 그런데 원래 책이란 그렇다. 10살 때와 20살 때, 그리고 그 뒤에 다시 읽었을 때 같은 책이라도 느낌이 전혀 다르다. 그동안의 경험이 다르고, 그로 인한 생각도 고민도 다르고, 당장 자신이 놓인 현실의 문제들도 다르다. 사람까지 한결같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문제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주위의 모든 것이 바뀌는데 자기만 그대로다. 저렇게까지 대놓고 티를 내는데 자기만 아무렇지 않다. 그것은 단지 고집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늙으면 고집만 는다는 게 그런 의미다. 내일보다 어제가 소중한 사람일수록 변화는 두렵고 무섭고 혐오스럽다.


그래서 차은호도 한 걸음 내딛으려 한다. 이제 앞으로 송해린과는 전과 같은 사이로 남을 수 없다. 좋은 선후배 사이로 남기를 바라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래서 망설여왔을 것이다. 송해린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도 말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모든 것을 감수하고라도 송해린을 떠나보내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 설사 그 결과가 기대와 다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사정이 바뀌었고 따라서 이제는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된다.


아마 지서준의 존재가 컸을 것이다. 마음놓고 있었다. 이제 강단이의 곁에 자기 뿐이다. 이혼까지 하고 나락으로 떨어진 강단이의 곁을 지켜줄 사람은 자기 한 사람 뿐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좋다. 그러니까 아무때라도 좋다. 그래서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답답하도록 느렸다. 하지만 그렇게 여유가 많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또다시 사랑하는 강단이를 영영 떠나보낼 것인가. 아니면 이번에야 말로 붙잡아 자신의 곁에 있게 할 것인가. 그래서 두렵더라도 무모할 지 모르는 한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심스럽다. 어쩔 수 없이 아무리 사랑을 잃어도 누나 강단이를 잃을 수는 없다.


이제는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진심으로 사귈 수 있는 사람도 생겼다. 인생의 새로운 전성기다. 능력도 있지만 역시 운이 좋다. 그런데 오랜동안 그저 동생으로만 여겨왔던 차은호에게서 전과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 차은호가 달라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마음이 달라진 것인지. 차은호가 새삼스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시작한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마음을 알아챌 수 있게 된 것이 문제인지. 그러나 답은 없다. 지금 지서준과의 만남이 사랑인지 아닌지 모르듯 차은호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어떤 것일까.


하지만 사랑은 사랑, 일은 일. 그래서 이 드라마가 좋다. 개인의 사적 공간과 회사의 공적 영역이 철저히 분리된다. 아예 분리되지는 않지만 괜히 뒤섞어서 혼동을 주지 않는다.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은 프로다. 일도 사랑도 열심인 송해린이 그래서 예쁘게만 보인다. 어디서 봤더라? 진짜 예쁘다. 멋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