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의 편에 선 양반이 적지 않았었다. 물론 조선이라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농민군과 맞섰던 양반 또한 상당했었다. 결국에 그럼에도 조선이라고 하는 질서를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변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것인가. 동학이 대안일수는 없지만 지금 이대로보다는 낫다.
고부의 명사 황석주에게 가해지는 고통과 모욕들이 심상치 않게 여겨지는 이유다. 부패한 아전 백가의 모함을 받아 모진 고문을 받고, 심지어 그를 빌미로 중인인 그의 집안과 사돈을 맺을 것을 강요당한다. 여성주의자들은 이런 드라마에 분노해야 하는 것이다. 오라비가 모함을 받아 죄인이 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고문을 당했는데, 그로 인해 주변의 양반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할 혼인을 받아들여야 했음에도, 그 당사자인 백가의 아들 백이현과 혼인하게 된 사실만 물색모르고 좋아하고 있다. 하긴 사랑에 눈이 멀어 나라를 지키는 자명고를 자신의 손으로 찢은 낙랑공주의 이야기도 있다. 그토록 자신의 오라비에게 수치와 고통을 안겨준 상대임에도 자신이 마음에 둔 백이현과 혼인하게 되었으니 전혀 아랑곳않는다.
과연 인근에서 대대로 명문에 명망높은 선비로써 황석주가 이대로 부패한 아전 백가의 위세에 휘둘리며 오욕을 견디고만 있을 것인가. 그동안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자신은 물론 그동안 자신의 가문이 쌓아올린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차라리 백가와 사돈이 되느니 멸문을 선택하겠다. 그런 황석주가 백가와의 혼사를 받아들였다. 아무리 백이현을 좋게 보았다지만 그 백가와 사돈을 맺기로 했다. 본심일까? 아니면 다른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일까? 전봉준은 여전히 무리를 이끌고 숨어다니며 관군을 상대로 항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름을 불렸기 때문이었다. 거시기라 불리는 동안 그는 사람이 아니었었다. 사람이 아니었기에 굳이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느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대로 사람들을 때리고 빼앗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이름이 주어졌다. 아무도 부르지 않던 이름 백이강을 불러주는 사람이 생겼다. 사람으로서 생각하라. 사람으로 스스로 느끼고 판단하라. 아이러니하게도 어르신이라 부르던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인정받고 나니 스스로 사람의 눈으로 돌아본 세상의 풍경은 이전과 전혀 달랐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 아니 그러도록 애써 외면해 왔던 타인의 고통과 감정이 그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못하겠다. 이대로는 못하겠다. 인간 백이강으로서. 아버지가 부리던 수단인 거시기가 아니라 백이강이란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이건 도저히 못해먹겠다. 백이현이 말한 좋은 이방 같은 것 자신은 못할 것 같다.
아마 서로가 서있는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백이강의 말이 맞다. 백이현은 백이강을 동정하고 있었다. 아닌 척 말하지만 결국 백이강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오만이 한 켠에 크게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에 아버지에 대한 인정을 선택한다.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는 고부 백성들의 현실을 직접 보고 듣고 겪어 왔음에도 그럼에도 차마 아버지에 대한 인정은 저버리지 못했었다.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많은 죄를 지었어도 아버지는 아버지다. 자신은 그런 아버지의 아들이다. 아버지보다 차라리 자신과 같은 처지의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백이강에 비해 평소 고고한 이상을 말하던 백이현은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정에 얽매이는 순간 정의는 정의일 수 없고 이상 또한 이상일 수 없다. 아마 황석주도 그것을 꿰뚫지 않았을까. 그는 백이현이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아버지 백가의 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차이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수단인 거시기에서 인간 백이강으로 돌아왔다. 개인 백이현에서 아버지의 아들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버지를 벗어나 비로소 아버지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들의 현실에 공감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그런 처참한 현실에 분노하며 반발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끝내 아버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시놉시스에서 언급한 서로 다른 운명을 걷는 두 형제의 선택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작가의 역사에 대한 냉정한 직관이 돋보이는 설정이었을 것이다. 무엇이 서로 전혀 다른 출발선에 섰던 그들이 또다시 상반된 길을 걷도록 만들었는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수많은 선량한 이들과 정의로운 이들과 인정많은 이들 가운데 어떻게 세상은 이토록 혼탁스럽기만 한가. 개인만 놓고 보면 모두가 좋은 가장이고 훌륭한 아들이고 괜찮은 이웃을 텐데도 세상은 이렇게 죄악으로 가득한 것인가. 바로 그런 시대에 대한 절망이 어쩌면 단순한 민란으로 끝날 수도 있었을 고부민란을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으로 키우고 만 것일지도 모른다. 더이상 선의도, 인정도, 정의마저도 온전하 제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없는 조선이라는 현실의 한계가 그를 부수고 나가도록 짓눌러댄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목숨을 건 봉기에도 남은 것은 더 처참한 절망과 좌절 뿐이다. 원망과 분노 뿐이다. 그럼에도 아무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아니 애써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역사의 임계점이다. 이미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다. 비극의 시대다. 차마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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