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녹두꽃 - 버려진 백성과 잔혹한 시대의 선택

까칠부 2019. 5. 5. 07:11

어쩌면 황석주는 구한말 양반의 모순과 이중성을 보여주기 위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겉으로는 인품도 학실도 훌륭한 이상적인 사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나 결국 현실의 고통에 꺾이고 자신과 가문의 체면을 위해 협잡까지 서슴지 않는다. 단지 조선이라는 나라와 함께 수백년 동안 세습되어 온 양반으로서의 허영과 위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알량한 가식마저 한순간에 벗어던지고 만다.

 

이강이 다음은 이현이다. 형제가 맞다. 이강이 먼저 현실을 보았고, 비로소 이현이 자신이 딛고 선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때리고 빼앗아 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고, 자신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그저 막연하게만 여기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겠거니. 그러지 않을까. 다만 이강은 아버지 아닌 어르신의 윽박지름에 애써 외면하고 있었고, 이현은 그저 알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자신의 아들까지 낳은 이를 단지 이강을 붙잡아두기 위한 목적으로 동학으로 내몰고 결국 살인자로 수배까지 받도록 만들었다. 그렇게까지 해가며 아버지가 얻고자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결국에 지금까지 자신이 누려 온 모든 것들이 그렇게 지키고 얻었던 것들은 아닌 것인가.

 

원래 자식들은 부모를 부정하며 어른이 된다. 부모를 부정하며 그 품을 벗어나 스스로 독립하게 된다. 인간은 때가 되면 태어난 곳을 떠나게 된다. 그렇게 수 십만 년 전 인간은 아프리카를 벗어났고 중동을 지나 유럽으로 아시아로 심지어 바다건너 아메리카로 오세아니아로 이동해갔다. 아들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아버지를 벗어나 아버지를 이기고 홀로 우뚝 서야 하는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를 위해서 백가는 아들 이현을 모든 노력을 기울여 가르쳤고, 이강 역시 백가에 의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독기를 배웠었다. 도망치지 않는다. 숨지도 않는다. 차라리 전봉준과 함께 싸우겠다. 살인자가 되어 쫓기게 된 것을 알았을 때 이강의 선택은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과 함께 싸우는 것이었다. 그러면 아버지에게 분노한 이현의 이후 선택은 무엇일까? 서모인 유월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관군을 피해 도망치던 선량한 청년의 이후 선택은 어떻게 자신의 이복형과 갈리게 될 것인가. 황명선과의 혼인을 앞두고 황석주의 모략에 의해 동학을 토벌하기 위한 병사로 징집되고 만다.

 

그러고보면 박영효도 그렇게 친일로 돌아선 경우였을 것이다. 이광수나 최남선 등도 비슷한 부류들이었다. 친일파라고 모두 일신의 영달만 바랐던 것은 아니었었다. 조선을 바꾸고 싶었다. 아직 야만상태에 있는 조선인을 바꾸고 싶었다. 조선을 문명국으로 만들고 조선인도 문명인으로 만들어야 했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 문명부터 손에 넣어야 했었다. 문명이야 말로 선이었고 정의였다. 당위였고 과제였다. 문명이야 말로 모든 것에 우선한다. 그러면 그 문명을 누가 가지고 있었는가. 서구의 열강과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가지고 있었다. 중국의 문명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 소중화가 되었던 것처럼 일본의 문명을 배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일본의 일부가 되고 일본인이 될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일본의 문명을 배우는 것이야 말로 조선과 조선민족을 위한 길인 것이다. 실제 많은 조선의 민족주의자들이 진심으로 조선과 조선민족의 미래를 위한 최선이라 여기며 친일의 길을 걷고 있었다. 정작 그 문명을 누릴 사람이 배제된 이상이란 얼마나 위험한가. 국민을 위해 국민을 죽이고 민족을 위해 민족을 도탄에 빠뜨린다.

 

전봉준과 백이현의 짧은 대화는 구한말 이후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지식인의 고민을 함축해 담아내고 있었을 것이다. 분명 역사는 발전되어야 한다. 조선의 현실도 백성의 삶도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어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무엇이 필요한가. 힘이 곧 정의이던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이 지배하던 시대에 무엇이 조선과 조선의 백성들을 살게 하고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할 것인가. 당장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조선과 백성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문명이란 수단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현실의 부당함도 모순도 그를 위한 과정으로써 기꺼이 인내하고 희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마저 인정하지 못하겠다. 당장 눈앞의 불의하고 부당한 모순들부터 해결해야 한다.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불의한 군사독재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지금도 반복된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군사독재는 필요했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사람들을 그 과정에서 일방적으로 희생시켜서는 안되었다. 지금 땅을 딛고 서 있는 백성들인가. 그 백성들의 앞에 펼쳐질 미래인가. 하지만 이후 이현은 자신이 딛고 선 그곳의 정체를 알아 버렸다. 그런 의식조차 없이 이강은 전봉준을 찾아간다.

 

송자인의 이강을 향한 마음이 익살맞도록 절절하다. 아닌 척 노골적이고 솔직하다. 이강 역시 송자인에게 마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아마 송자인의 아버지가 전라도 보부상의 행수란 사실이 이후 동학군과 함께하는 이강의 행보와 이어지게 될 것이다. 왕명에 의해 관군마저 무찌르고 파죽지세이던 동학군을 막아섰던 것이 바로 이들 보부상들이었다. 이강이나 이현이나 송자인이나 시대는 젊은이들을 그저 그들이 순수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저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강은 떠나고 송자인은 그 떠남을 받아들인다. 이현은 이강이 있는 전장으로 어른들의 사정으로 역시 떠나간다. 백 년도 훨씬 지난 후대의 우리들이야 그들이 앞으로 지나고 마주하게 될 길들에 대해 이미 들어 알고 있다. 운명은 얼마나 또 가혹하게 그들을 휘두르게 될 것인가.

 

민주주의의 소중함이다. 전근대사회에서 백성이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았었다. 세금을 거두고 인신을 징발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었다. 사람이 아니다. 존중하고 배려해야 할 주체가 아니다. 그나마 아직 성리학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이 남아있던 시대에는 위민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위선일지라도 지배신분으로서 마땅히 백성들을 아끼고 위해야만 한다. 그마저도 권력이 정한 선을 넘으면 조금의 관용도 없었지만 알량한 이상마저 퇴색해버린 조선후기에 이르면 그저 권력의 관성만이 남게 된다. 권력자는 백성을 지배하고 백성은 그 지배에 따른다. 백성은 권력자에 지배하며 권력자는 그들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저 동학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이고 노인이고 여자고 할 것 없이 함부로 죽여도 된다. 하긴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며 성별과 나이를 따로 따지거나 하지는 않았었다. 사람의 목숨이란 고작 그런 가치인 시대다. 참고로 저 안핵사 이용태가 경술강제병탄의 공로로 남작작위를 받기 전까지 대한제국 말까지 을사조약에 적극 반대하는 등 나름대로 충신의 행보를 보이던 인물이었다. 결국 민심을 달래라고 보낸 안핵사 이용태의 잔인하고 가혹한 정책으로 말미암아 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처럼 동학농민운동이 더 크게 일어나게 되었음에도 이내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요직에 오르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 조선의 현실을 보여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부민란의 원인을 제공한 조병갑도 바로 유배에서 풀려나 동학교주 최시형의 사형판결을 직접 내린 바 있었다.

 

조정이 먼저 백성을 버렸기 때문이다. 백성을 지켜야 할 지배층이 먼저 백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버려진 백성들이 모인다. 버려진 백성들이 모여 스스로를 지키려 한다. 그나마 사대부가 지키고 지방관이 지키고 조정이 지켜주던 백성들이 아무도 지켜주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성난 불길이 되어 모든 것을 태우게 된다. 그 업보다. 조선이 망하고 만 것은. 동학을 진압하기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 외세로 인해 주권을 잃고 말았다. 버려진 아들과 버려진 백성과 아버지에게 의문을 품은 아들과 그 백성을 버린 권력이 한 데 어우러진다. 격동의 시대에 마음과 마음이, 탐욕과 욕망이, 간절한 이상과 바람들이 한 데 부딪힌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어쩌면 이제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그 당연한 한 마디가. 그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하늘일 수 있을까. 지난 역사임을 다행스럽게 여긴다. 차라리 먼 옛날의 이야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