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내게 거짓말을 해봐 - 아니, 그건 그것대로 괴로워...

까칠부 2011. 5. 24. 08:59

“그렇지만 첫사랑인데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 좀 멋있으면 안 되나?”

“아니, 그건 그거대로 괴로워...”

 

두 남녀가 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같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남녀가. 그러나 서로 반대편에서 첫사랑을 추억하는 이들이다. 떨어지는 꽃잎 사이에서.

 

공아정(윤은혜 분)의 결혼에 대한 환상은 천재범(류승수 분)과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서 비롯된다. 단지 짝사랑으로 끝나버린 첫사랑은 때로 이상화되어 기억되기 쉽다. 아직 서로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없기에 이상화하여 좋아하던 그대로 이상적인 모습으로 남게 된다.

 

공아정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고 유일한 사랑이라며 여전히 사랑도 못하고 혼자인 이유가 그것일 것이다. 이상화된 첫사랑이 사랑을 이상화하고 결혼을 이상화하며 현실로부터 유리시킨다.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기까지는.

 

공아정의 유소란(홍수현 분)에 대한 열등감도 그로부터 비롯된다. 자신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던 천재범과 마침내 결혼에 성공한 여자. 그것은 공아정이 이루지 못한 것이고 천재범에 대한 공아정의 환상이 강해질수록 유소란에 대한 열등감은 커져갈 수밖에 없다. 그녀로 하여금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했다는 거짓말을 하게 하고, 현기준(강지환 분)이라는 거물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천재범이 바람을 피다니. 행복한 줄로만 알았다. 행복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남자들 바람이 아주 그냥 본능이야, 본능! 눈이 막 돌아가나 봐? 쳇!... 아! 선배만 빼고...”

 

그래야만 했다. 그녀가 좋아한 사람이니까. 좋아했던 사람이니까. 이루지 못한 꿈이기에 그 꿈은 더욱 아름답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눈앞에서 포기한 포도는 시고 벌레 투성이지만 미처 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했던 포도는 무척이나 달고 향기로울 테니까. 그런데 그 꿈이 눈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이란...

 

그것은 천재범에 대한 분노이거나 배신감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이제껏 놓아 버리지 못한 아름답기만 하던 첫사랑의 기억에 대한 연민이다. 더 이상 친구의 남편이고 사랑하는 사람도 아닌데 서럽고 화가 나는 것은 그래서다.

 

반면 현기준의 경우는 변하지 않은 오윤주의 존재가 여전히 가슴 아프다. 싫어해서 헤어진 것이 아니었다. 미워서 멀어진 것이 아니었다. 동생 현상희로 인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현상희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 없이 홀로 삭여야만 했던 아픔이고 그런 결정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오윤주에 대한 미안함이다. 그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여전한 오윤주의 모습이라니.

 

차라리 달라졌으면. 그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면. 사귀는 사람이 있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고, 아니더라도 그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면. 그랬다면 마음의 짐은 조금 덜 수 있었을까? 아직 털어버리지 못한 감정들은 정리할 수 있었을까?

 

변해버린 첫사랑에 상처입은 공아정과 여전히 변하지 않은 첫사랑의 모습에 애써 묻어두고자 했던 상처를 일깨운 현기준. 운명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그보다는 작가의 농간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래서 만나야 했다. 전혀 다른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서로 먼 반대편에서 운명에 이끌려 그 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어야 했다.

 

현기준이 문득 공아정에 이끌린 것도 그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아정의 눈이 현기준의 입술에 머문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운명의 실이 그렇게 이어졌다.

 

다만 꿈이란 깨어나면 사라지는 허깨비와도 같은 것이기에. 그 찰라의 순간은 공아정이 술에서 깨는 순간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자신도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당황하며 곤란해 하는 현기준은 아랑곳없이. 현기준은 참 불쌍한 캐릭터다. 어쩌면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사방이 그를 곤란하게 하려는 사람들뿐인가.

 

물론 앞으로 많이 남았다. 무엇보다 공아정에게는 현기준에 대한 어떠한 호감도 없다. 그럴 계기를 알콜이 깨끗이 지워 소독해 버렸다. 현기준에게는 오윤주라고 하는 아직 털어버리지 못한 과거의 감정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 유일한 현실의 끈이 거짓결혼. 거짓말이 사실이 되는 그 순간을 위해서.

 

오유란은 참 매력적인 캐릭터다. 상당히 재수없는 악역 캐릭터일 텐데, 그러나 솔직히 보고 있으면 귀엽다는 생각마저 든다. 굳이 다른 사람을 의식해가며 허세를 부리는 그 모습 이면에는 어떤 깊은 열등감이 자리하고 있을까?

 

아마 그러한 오유란의 열등감에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공아정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천재범과 결혼한 이유도 그것이 아니었을까. 천재범과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연기해 보이는 것이 주위를 의식한 것이듯. 천재범이란 그녀의 뿌리깊은 열등감을 가려주는 존재다. 차라리 천재범의 외도에 대해 분노하기보다 공아정의 남편으로 알고 있는 현기준의 밀회현장을 발견한 사실에 더 반가워하는 것은 그래서다. 공아정도 나와 다르지 않다. 공아정 또한 나만큼이나, 혹은 나보다 더 불행하다.

 

"네 맘 다 알아. 부정하고 싶겠지. 나 때문인가? 내가 어디에 문제가 있나? 자괴감도 들 거고."

"괜찮아, 절대 네 잘못 아냐!" 

 

그녀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다. 그녀가 하고 싶은 말. 그녀가 듣고 싶은 말. 그것을 그녀는 자신의 입으로 공아정을 통해 하고 듣게 된다. 위로하고 위로받는다. 차라리 자신을 위로하기보다 공아정을 위로하기를. 그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위로받는 방법이다.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마치 남들 다 부모가 우산을 가지고 왔는데 홀로 비를 맞으며 돌아가야 하는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투정을 보는 것 같아서. 괜히 엄마와 같이 우산을 쓰고 가는 아이가 얄밉고 괴롭혀주고 싶다. 그런데 들고 가는 우산이 낡아 녹슬고 헤어졌다면 과연 어떨까? 괜찮다며. 그래도 상관없다며. 문제없다며. 동정일까? 아니면 단지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인 것일까? 그렇게밖에 아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

 

오유란의 성장과정을 보고 싶은데. 어쩌면 공아정이 그녀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 여기는 것이 그녀를 더 집착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다가섰다면, 그래서 공아정의 그녀에 대한 열등감이나 분노를 알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돌아보지 않는 것이 때로 가장 큰 분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현상희(성준 분)는 역시 작가의 손발이다. 공아정에게 - 정확히는 작가가 필요한 순간에 현상희는 바로 나타나 역할을 한다. 공아정이 통장을 담보로 대출받은 돈이야 얼마나 할까? 하지만 그녀의 수준으로 그같은 현기준과의 결혼반지라 여겨질만한 고가의 반지를 사거나 빌리기에는 무리다.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꼬아 비틀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현상희가 있음으로써 공아정은 충분히 유소란을 약올릴 수 있다.

 

현기준의 최측근으로 손발을 자임하면서도 의외로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비서 박훈(권세인 분)은 참 남자에게 그런 말을 하기 그렇지만 해맑다. 전문용어로 천연이라고 해야 할까? 현기준의 가장 가까이에 존재하는 광대의 역할이다. 현기준의 내심을 비쳐 보이며 현기준의 행동을 이끄는. 현기준의 친구이며 호텔 매니저로 나오는 박매니저 역의 박지윤은 이미 가수로서의 그녀의 모습을 알고 있는 필자조차 놀랄 정도로 빼어난 미모를 과시한다. 분량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연기력까지 평가하기에는 뭣하지만 존재감이 압도적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던가.

 

전형적인 듯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디테일하다. 애경카페의 사장 심애경(이경진 분)과 자신의 아버지 공준호(강신일 분)과의 결혼을 15년 전 공아정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반대했다는 점에서 결혼에 대한 공아정의 결벽을 알 수 있다. 그녀가 천재범과의 첫사랑을 이상화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는 데 대한 충분한 설명이었을까. 물론 지금에야 뒤늦게 심애경과 공준호의 사이를 응원하는 듯 보이지만 말이다. 성장일 것이다.

 

여러 가지로 의미있는 회차였다. 현기준과 공아정이 맺어질 수밖에 없는 필연에 대한 복선이었을까? 현기준의 내면에 변화가 일어난 듯 하고. 다만 그럼에도 현기준은 공아정에게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설정이라는 것이다. 명복을 빌며. 재미있었다. 달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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