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계백 - 영웅서사 없는 영웅서사...

까칠부 2011. 9. 13. 10:38

드라마 <계백>이 갖는 가장 치명적인 부분일 것이다. 영웅서사란 사실 인류보편의 코드를 갖는다. 바로 시련과 극복이다. 영웅이 갖는 영웅성은 보통 사람이라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고 강한 시련을 통해서 마침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출생은 합격이다. 위대한 아버지와 그러나 불행한 출생. 영웅은 고아인 경우가 많다. 영웅에게 있어 아버지 역시 극복의 대상인 때문이다. 알렉산드로스처럼 아버지를 죽이지 않을 것이면 아버지가 죽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명을 남긴다. 복수, 혹은 이상이라는.

 

아버지의 죽음과 이어진 노예생활. 노예란 또한 영웅서사의 중요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다. 노예란 가장 비천한 신분이다.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다가 마침내 그 영웅성을 드러내어 가장 고귀하고 영광된 지위를 손에 넣게 된다. 얼마나 멋진가.

 

문제는 과연 계백(이서진 분)에게 있어 생구시절이란 바로 그러한 시련과 고난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신라군의 화살받이가 되어 전장을 전전해야 했을 테니 그 시절이 그다지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시청자들에 보여지지 않았다.

 

그는 노예이던 시절부터도 이미 영웅이었다. 영웅으로써 또다른 영웅 김유신(박성웅 분)와 만나고 있었고, 그를 도와 여러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마침내는 백제의 왕자 의자(조재현 분)를 도와 생구로부터 탈출하기까지 한다. 그나마 가잠성 전투에서 복수를 위해 의자를 죽이러 탈출했다가 생구들을 살리려 돌아와 죽을 위기에 놓이는 정도가 영웅적인 시련의 전부일까?

 

백제로 돌아오고 나서는 더 심각하다. 그렇게 무왕(최종환 분)과 계백의 아버지 무진을 악마와도 같은 지략과 힘으로 끝없이 몰아붙이던 사택왕후(오연수 분)는 이미 힘이 빠져 더 이상의 새로운 일을 꾸밀 여력이 없다. 기껏해야 생구들에게 돌아갈 쌀과 돈을 외경부 관리 건출이 빼돌리고 그에 내좌평 기미(김중기 분)와 대좌평 사택적덕(김병기 분)가 연루되며 사택왕후까지 그와 연관된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조차도 생구들이 분을 참지 못해 관리를 죽임으로써 난으로까지 커진 것이었지 사택왕후가 직접 관여한 것은 없었다.

 

과연 백제로 돌아오고 나서 계백이 사택씨와 관련해서 겪어야 했던 시련이란 무엇이었을까? 생구들의 반란조차 괜히 일만 커졌을 뿐 허무하도록 쉽게 어려움으로부터 빠져나와 흥수(김유석 분)가 이끌고 있는 까막재 유민촌에 합류하고 있었다. 그것도 시련이라 해야 할까? 그러고서는 가까운 이들을 지켜야 하겠다며 스스로 사택왕후의 측근으로 숨어들고.

 

이것도 좀 우스운 것이다. 그리 강하고 악하여 모두가 두려워해야 할 적이어야 하는데 은고(송지효 분)며 계백이며 너무 쉽게 그 측근으로 숨어들고 있다. 그렇다고 그 과정에서 따로 시련이 있는 것도 아니라, 은고가 겪어야 했던 시련이란 아버지의 원수인 사택적덕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 뿐, 계백에게 주어진 시련은 한 바탕 연극에 불과한 사택왕후의 시험이었다. 마치 주인공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듯 모든 것이 순조롭게만 풀려간다. 그리고 결국 건출과 관련해서 기미의 인물됨을 읽지 못해 다시 스스로 어려움을 자초하고 있는 것을 보라. 그러나 그것을 은고는 읽고 있었다.

 

결국 위제단조차 허무하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본거지마저 잃고 말았다. 위제단주 귀운(안길강 분)이 충격을 받아 쓰러진 사택왕후를 찾아왔다가 어이없이 계백에게 뒤를 밟히고, 여기에 사택왕후의 아들인 왕자 교기(진태현 분)가 위제단의 본거지를 문근(김현성 분)에게 누설함으로써 본거지를 기습당하고 만 것이었다. 여기에서 반전이 있지 않고서는 그동안 위제단이 보여주었던 음험하고 위협적인 폭력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목에 드리워진 칼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긴장이고 뭐고 없다.

 

하여튼 이번 연문진(임현식 분)의 사택씨에 대한 거사라는 것도 결국 가만히 있는 사택씨를 공격하려는 것이라. 기미의 이탈을 시작으로 귀족층의 분열 역시 너무나 쉽게 표면화된다. 의자처럼 보는 입장에서도 여기에서 어떤 반전이 있을 것을 기대하게 된다. 최소한 이 모든 것이 사택씨의 음모였으며, 그로 인해 의자나 계백이 목숨을 잃을 위기 정도는 빠져주어야 사택왕후는 영웅에게 시련을 주는 적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이다. 고작 이런 정도로 흔들려서야 이미 그 가장 가까운 곳까지 침투해 들어간 계백에게 시련이 될 수 있겠는가. 벌써부터 이렇게 쉽게 헛점을 드러내고 해서야 아무런 긴장도 흥미도 주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긴장이 없다. 긴장이 없으니 간절함이나 절실함도 없다. 계백이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계백에 이입하여 그와 함께 성취감을 느낄 일도 없다. 크게 위험한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크게 무언가를 이루고 한 것도 없었고. 딱 그만큼. 위기도 그만하고. 성취도 그만하다. 적인 사택왕후도 그만하다. 그만하지 않은 것은 의자와 계백을 둘러싼 주위의 인물들. 그냥 활극이다. 어린이대상의 영웅물도 이렇게까지 일방적이지는 않다.

 

결국은 계백이나 의자에게 시련을 줄 적으로써의 사택왕후나 사택씨의 형상화에 실패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드라마의 스케일상의 문제이기도 하다. 주위에 사람이 없다. 적어도 사택왕후나 대좌평 사택적덕 정도쯤 되면 주위에 사람이 넘쳐나야 한다. 그것이 무왕이나 다른 귀족들을 압도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주도적으로 일을 꾸미며 계백이나 의자에게도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마침내 사택왕후와 사택적덕을 쓰러뜨렸을 때 성취감을 시청자 또한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위제단조차 무진으로 인해 그 권위가 훼손되었고 보면.

 

위제단에 의해 무진이 살해당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위제단이 아예 궁궐 안까지 쳐들어와서 무진을 죽이고 무왕을 협박한다. 귀족들마저 그런 사택씨를 두려워하여 감히 반항할 생각을 않는다. 적어도 연문진이 사택씨를 상대로 일을 꾸밀 때 사택씨를 두려워해서 연문진에 반기를 드는 웅진귀족 정도는 나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영웅서사에 어울린다. 계백이든 의자든 영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전혀 없으니까. 말로만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드라마에서 사택씨와 무왕의 힘의 차이가 그렇데 드러날 까닭이 없다. 귀족 가운데 조정좌평 왕효린(김진호 분)이 무력한 무왕의 편에 서서 사택씨와 적대하려 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렇다고 역사에 충실한가 하면 이 드라마에 '역사드라마'라고 하는 장르이름을 붙여주기에는 너무 심각한 수준이다.

 

아무튼 그래서 기대한다. 이번 연문진의 거사가 실패하기를. 그것도 압도적으로. 사택왕후가 숨겨두고 있는 패가 드러나며 의자나 계백이나 더욱 신중하게 거사를 모의하기를. 더욱 두려워하고 더욱 경계하며 더욱 비장하고 간절하게. 그러자면 또 몇이 죽어나가야 할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만큼 시청자 또한 더욱 그 잔혹함에 치를 떨며 영웅을 기대하게 되지 않을까?

 

결국은 영웅서사다. 그러나 영웅서사가 아니다. 영웅서사인데 정작 영웅서사가 아니게 되면 영웅들이 떠 버리게 된다. 아무리 영웅스럽게 말하고 행동해도 너무 동떨어진다. 그들은 어째서 영웅인가? 먼저 시청자부터 설득해야 하지 않을까? 왜 그들을 영웅으로써 바라야 하는가? 대중은 영웅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어떤 영웅을 그리고 있는가?

 

나름대로 잘 만든 드라마다. 그래서 기대를 가지고 지켜봐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런 기대도 흥미도 없이 그저 지루하게 습관처럼 보고 있을 뿐이다. 물음이 필요한 시점일 것이다. 무엇을 그리려 하는가? 무엇을 보여주려 하는가? <계백>이란 어떤 드라마인가?

 

안타깝다. 오히려 아역들이 나올 때가 더 나았다. 오히려 그때가 영웅다웠다. 철없이 저자를 떠돌던 계백이나, 억지로 자신을 억누르며 사택왕후 앞에 목숨을 이어나가던 의자나,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나 할까? 재정비가 필요할 것이다. 이대로는 어렵다. 반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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