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나 다를까 벌써 힘이 빠져 버렸다. 물론 이서연(수애 분)은 갈수록 심해지는 병으로 인한 절망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고까지 한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의 중심은 이서연의 비극이 아닌 시부모와의 갈등이 되어 버렸다. 어느새 이서연이 낳은 딸을 손녀로 받아들이고 주책없이 자랑하는 박창주(임채무 분)의 모습에서 모든 긴장을 풀어져 버린다.
드라마가 저지른 패착이었다. 알츠하이머가 드라마의 중심소재였다. 여주인공 이서연이 알츠하이머를 앓는다는 것이 드라마의 핵심줄거리였다. 그 위에 박지형(김래원 분)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이서연을 이제껏 길러준 고모의 가족과 박지형 가족의 온갖 수많은 감정들이 얽혀들었던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화해하며 그렇게 이서연의 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서연의 병이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버렸다.
박지형이 노향기(정유미 분)과 헤어지는 과정부터가 너무 요란스러웠다. 이서연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는 그럼에도 여전히 올곧고 순수하기만 한 노향기의 비극이 더 크게 다가왔다. 박지형이 이서연을 사랑하기도 전에 박지형의 가족과 노향기의 가족이 먼저 대립하고 있었고, 박지형이 마침내 이서연과 결혼하기도 전부터 박지형의 가족과 노향기의 가족이 서로 화해하고 있었다. 박지형이 이서연과 결혼하고 나서도 노향기의 오빠 노영수(송창의 분)이 노향기 가족에 분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서연으로 인해 강수정(김해숙 분)과 오현아(이미숙 분)이 서로 대립하기도 했었다. 오즉하면 리뷰를 쓰려는데 박지형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배우의 이름인 김래원을 그대로 쓰려 하고 있었다. 필자의 스타일상 그리 없는 일이다.
더 이상 이서연의 병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과연 그를 매개로 어떻게 주위와 관계를 만들어가는가? 이서연의 병으로 인해 갈등하고, 그러면서도 이서연의 병으로 인해 화해하고, 물론 중심에는 이서연의 병이 있다. 하지만 촉매가 달리 촉매가 아니다. 작용하는 것은 촉매가 아니다. 단지 갈등하고 화해하고 있을 뿐 이서연의 병이란 단지 소재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서연의 병이 더욱 깊어지지 않은 이유였다.
이서연의 병이 깊었다면, 그래서 벌써부터 19회에서와 같이 사고를 치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면, 그랬다면 박지형의 가족은 몰라도 노향기의 가족까지 돌아볼 여유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이서연을 미워하고 원망하기 전에 그녀의 병을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이서연과 화해하기 전에 그녀의 병을 연민하고 동정하고, 노향기와 만날 당시에도 이서연은 너무 멀쩡했다. 이서연이 안타까워 노향기가 그저 눈물만 흘려야 했다면 드라마의 분위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러나 노향기는 이서연과 마주한 순간에조차 노향기였다. 이서연의 비극은 노향기에게 그런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아마 그것을 상징하듯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아이를 두고 엄마니까 한 번 안아보라던 박지형의 어머니 강수정과 그것을 거부하는 이서연의 작은 실랑이였을 것이다. 이서연은 당시 서 있는 채였다. 서 있는데 아이를 안고 있다 떨어뜨리면 아이는 크게 다칠 수 있다. 알츠하이머란 당장 지금의 행동조차 예측이 안 되는 병이다. 어떤 일을 저지를 지 알 수 없다. 어떤 일을 저지르더라도 알츠하이머이기에 납득이 된다. 그런데 이서연은 그것을 알지만 강수정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저 며느리의 병에도 불구하고 손주 자랑에 여념이 없는 남편 박창주처럼 이서연을 자리에 앉게 하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곁에서 살피며 안게 해주는 배려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 몸과 마음이 불편한 며느리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않은 강수정조차 이서연의 병에 대한 인식이란 그런 정도다.
누구도 이서연의 비극에 빠져들어 있지 않다. 누구도 이서연의 비극에 대해 이서연처럼 공포를 느끼고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이서연을 절망케 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서연 자신은 자신의 병이 공포스러운데 주위는 그렇지 못하다. 드라마처럼 이서연의 비극은 단지 이서연의 비극일 뿐이다. 아니 그래서 더 공포일 것이다. 겉으로 멀쩡하니 이서연 자신은 느끼는데 정작 주위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남편 박지형은 그런 이서연의 곁에 있어주는 자신에 만족하고 있을 뿐이고, 동생인 이문권(박유환 분)은 예전의 멀쩡했을 때의 이서연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위화감이 그들을 두렵게 하고 혼란케 하지만 그것은 이서연과 유리되어 있다.
물론 시청자 역시 따라서 이서연의 병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다. 어느새 구경꾼이 되어 그녀의 병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서연이 병보다는 시부모와이 관계가, 이서연의 비극보다는 노향기와의 대화가, 이서연의 절망보다는 주위의 인물들이, 하물며 전혀 관계도 없는 노향기의 가족까지 너무 많은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 이서연이 죽으려 해도 그러려니. 이서연이 옷을 입은 채 물에 들어가 있고, 끝내는 치매인 것을 보여주고자 카레를 맨손으로 집어먹어도 역시 그러려니. 조금은 생뚱맞은 것도 있었다. 어째서 거기서 이서연은 카레를 굳이 맨손으로 먹었어야 했을까?
차라리 그같은 너무나 속보이는 전형적인 연출보다 더 충격적이고 더 직접적인 아이디어가 있지 않았을까? 하기는 그럴 경우 공중파 드라마로서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모습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나이 많은 중견 이상이라면 모를까 수애는 아직 젊고 아름다운 한창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배우다. 결국 드라마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가 여기까지였고, 그것이 드라마의 한계를 스스로 결정지은 것이 아닌가. 알츠하이머가 드라마의 중심인데 알츠하이머마저 잊혀져 버렸다.
오히려 그보다는 노향기와의 대화가 더 인상에 남지 않았을까? 물론 뻔하다. 진부하다. 이미 지난주 이서연이 노향기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전개이기도 하다. 죽고 난 이후를 걱정한다. 처음부터 그러한 끝을 예감한 결혼이었고, 그래서 거부하다가 끝내 받아들여 한 결혼이었다. 걱정이 없을 수 없다. 박지형을 사랑하는 만큼 아이와 함께 자신이 사라진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박지형을 걱정하게 된다. 다만 노향기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마 노향기의 이제까지의 캐릭터대로라면 그런 식으로 박지형을 물건처럼 주고받느니 일찌감치 다른 남자를 골라 결혼함으로써 마음의 짐을 덜어주겠다. 그녀는 그렇게 올곧고 순수한 캐릭터였다. 사람은,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남에게 맡겨도 좋은 물건같은 것이 아니다. 조금은 오래된 냄새가 났을까? 만일 가능하더라도 드라마 한 편 분량의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잘하면 <천일의 약속> 시즌2를 기대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할까?
많이 실망스럽다. 중반까지 묵직하게 힘이 실린 전개가 작가의 이름과 함께 크게 기대를 품게 했다면, 마무리는 너무 힘이 빠져 버렸다. 긴장이 풀렸다. 아무리 바로 다음이 마지막회라 할지라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는가?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졸이면서 바로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두려워하게 만든다. 좋은 드라마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드마라일 테지만. 그러나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 한 탓에 정작 중심을 잃고 힘도 잃어 버렸다. 이서연의 병이 인상에 남아 있지 않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었는가?
그래도 마무리를 기대해 본다. 원로라 불리우는 대작가인 만큼 허술한 마무리는 보여주지 않으리라. 지금의 실망을 만회할만한 그런 멋진 마무리일까? 갈등은 봉합되고 그런 만큼 이서연의 비극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웃으며 운다. 행복해하며 절망한다. 가능하다면. 아마 가능할 것이다.
이서연은 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연만 병을 앓고 있었다. 이서연만이 병을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는 관계에 집착한다. 새삼 깨닫게 되는 부분이다. 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서연의 비극도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허무하다. 많이 허탈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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