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드라마만의 장점이면서 또한 한계다. 이야기의 세 가지 구성요소를 인물과 관계와 사건으로 놓았을 때, 가까운 일본의 경우 주로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면 한국드라마는 관계에 매우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관계가 인물을 정의하고 사건을 만들고 이끌어간다.
당장 이강훈(신하균 분)만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다가가기에는 상당히 문제가 많은 성격이었을 것이다. 오만하고, 완고하며, 공격적이다. 강박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지독스런 자기애와 그에 따른 다른 사람에 대한 엄격함, 사실 이강훈이 처한 어려움이란 그러한 자신의 성격적 결함에서 비롯된 부분이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연민한다. 어째서일까?
결국은 주위와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이강훈을 일방적으로 이용만 하고 저버린 학과장 고재학(이성민 분)이나, 이강훈에게만 유독 엄겨하고 매몰찬 김상철(정진영 분)이나, 뒤에서 잔수를 부리려는 동기 서준석(조동혁 분), 이번에는 그를 따르던 동승만(이승주 분)마저 서준석에게로 돌아서고 말았다. 하기는 이강훈이라는 비빌 언덕이 사라졌는데 동승만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치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이강훈을 괴롭히려는 듯 보인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굳이 이강훈을 개인연구원으로 채용하며 서준석을 그 위에 놓으려는 김상철의 의도가 무엇인가? 애초의 기획의도에서처럼 이강훈을 가까이에 두고 가르쳐서 사람 만들어 보려 그러는 것이라면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모욕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모욕은 한 인간의 인격을 짓밟고 뭉개는 것이다. 그를 자신과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강훈의 주장에 동의하게 된다. 어째서 김상철은 이강훈 앞에서만 인격자로서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가? 그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것일까? 그것은 분명 증오였다. 일부러 이강훈을 멀리하고자 그를 모욕하고 가학하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서준석은 어떨까? 하기는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필자의 경우라도 동기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려 한다면 결코 좋은 감정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해외 명문대 유학마저 포기하게 만든 좋아하는 여자 윤지혜(최정원 분)가 이강훈을 좋아한다. 그를 자기 사람이라 부르면서도 학과장 역시 은근히 그를 이강훈과 비교하며 이강훈의 밑에 두고 있다. 그동안 당한 일도 있고, 이번에 온라인으로 기습적으로 발표한 논문의 일도 있고, 한 번 쯤 제대로 한 방 먹여주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만일 그가 주인공이었다면.
서준석이 주인공이었어도 꽤 재미있는 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다. 한국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과도한 기대와 오로지 아버지의 배경만을 보려 하는 주위 사람들, 한참 앞서나가는 동기는 자신을 질시하여 적개심을 드러내고, 좋아하는 여자는 그 동기만을 바라보고 있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고 누구도 자신을 평가해주지 않는다. 웃는 얼굴 가운데 그저 좋은 사람으로만 남아 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조교수의 자리에 오르고 권력이라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최고의 실력과 재능을 가진 동기가 그 대상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주인공이 이강훈이기에 그 역시 이강훈을 괴롭히는, 심지어 그에게 연구실 청소를 지시하는 악역으로 남고 만다.
고재학이야 아직도 이강훈에 대한 미련이 강하다. 만일 이강훈이 김상철이 아닌 고재학을 통해 병원에 복귀할 것을 부탁했다면 고재학은 못 이긴 척 들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이 아닌 김상철이었고, 더구나 이미 중지한 논문이라면서 기습적으로 온라인에 먼저 공개하고 말았다. 배신감과 상실감, 고재학의 이강훈에 대한 감정은 그러한 애증과 분노다. 약간은 후회도 있다. 하기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고재학의 옆에 서준석이 있는 이상 이강훈이 그 밑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이익과 인정은 그래서 다르다.
김상철 밑에서는 서준석의 밑에 있는 것도 감당할 수 있다. 어머니의 일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에 어머니를 위해 무어라도 해주고 싶다고 하는 이강훈다운 결심이 그로 하여금 순수하게 한 가지 목적에 매진하게 만든다. 굳이 이익을 따지려 하지 않는 계산이 전제되지 않은 이강훈의 첫번째 선택이다. 조교수가 되고자, 최고가 되고자 경쟁하며 앞으로만 달려가던 무렵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김상철이 악역으로 비치는 것이다. 이강훈의 몇 안 되는 순수를 그런 식으로 모욕하고 짓밟아 버렸다. 타이밍이 안 좋다. 만일 작가의 의도가 그것이 아니었다면 그 부분에서는 김상철의 행동에서 약간의 조율이 필요했다. 하필 서준석의 밑에 그를 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동승만의 배신은 배신이랄 것도 없었다. 이강훈이 여전히 천하대학병원에 근무하고 있었다면 동승만은 변명의 여지없이 이강훈을 배신하고 서준석에게로 줄을 갈아탄 것일 게다. 하지만 더 이상 천하대학병원에 이강훈은 없었다. 그가 믿고 의지하고 따르던 멘토와 같은 존재인 이강훈이 더 이상 천하대학병원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강훈이 진행하던 논문을 이강훈과 상의없이 진행한 것은 그의 잘못이지만, 그렇게밖에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이강훈에게는 실력과 그에 어울리는 자존심이 있었지만 동승만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아마 그러한 심약함이 혼자서 연구실을 정리하고 있는 이강훈을 외면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다.
다른 전공의들은 그다지 언급할 것도 없다. 이강훈에게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같다.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한때 그에게 입안의 혀처럼 굴었던 양범준(곽승남 분)도, 항상 멍하던 여봉구(권세인 분)도, 그나마 조대식(심형탁 분)이 이강훈의 영락한 처지에 대해 동정심을 품지만 그것은 당연히 가지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감정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역시 사건이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각각의 캐릭터가 중심이 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관계가 없이는 모두는 존재감이 없는 1, 2, 3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강훈의 일인드라마가 되고 마는 이유일 것이다.
그나마 올곧게 이강훈만을 바라보고 있는 윤지혜와 그렇게 이강훈에게 거절당하면서도 항상 이강훈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장유진(김수현 분) 정도만이 이강훈에게 도움이 되는 인물들일 것이다. 윤지혜는 이강훈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장유진은 이강훈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려 한다. 그래도 작가의 배려로 주인공이라고 아주 외롭지만은 않다. 다만 역시 이강훈에게는 그에게 도움을 주려 하는 장유진보다는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윤지혜가 더 끌리지 않을까?
그의 완고한 에고는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보다 자기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김상철과의 거래 와중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환자를 살리려는 그의 의지는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필요한 존재로 있고 싶다는 원초적 자존감을 드러낸다. 그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이다. 그래서 어머니를 위해 영락을 결심하고, 환자를 위해 김상철과 대립하며, 장유진보다는 윤지혜에게 마음이 간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장유진에 대한 안쓰러움으로 그녀의 편을 들고 싶어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강훈의 영락은 가속된다. 그의 캐릭터를 위해서다. 그에게 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관계가 캐릭터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관계를 통해 끊임없이 인물을 자극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자극 가운데 캐릭터는 어느새 스스로 드러나 보이게 된다. 관계가 사건을 만드는 것 역시 그러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 우호적이거나, 혹은 적대적이거나, 그러한 주위와의 관계를 통해 사건이 일어나고 인물들은 그 가운데 던져지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며 주인공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성장하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며, 끝내 그것을 극복해내기도 한다. 그것이 드라마다.
주위의 인물들마저 주인공을 통해서만이 자신의 캐릭터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의 드라마 팬들은 그렇게 인물들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고 선악과 호불호를 구분하게 되는 것이다. 오로지 주인공을 통해서만 인물들을 보게 된다. 사건 역시 주인공과 관계 있을 때 의미가 있다. 주인공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일지라도 주인공과 관련한 사건에서 주인공과 관계를 갖고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래서 그렇게 드라마에 이입하며 감정들이 들끓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저히 주인공이 드라마의 중심에 있으며 시청자로 하여금 자신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한다. 한국드라마의 가장 큰 감정일 것이다. 동시에 한계다.
과연 이강훈이라고 하는 강한 캐릭터에게 있어 주위의 우호적인 도움과 적대적인 고난 가운데 어느 쪽이 더욱 그를 드러내 보이는데 도움이 될까? 이강훈이 마침내 성장하든, 전혀 다른 자신으로 바뀌게 되든, 아니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마지막 승자가 되든, 결국 이강훈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강한 것을 굽히게 만들고, 오만한 이를 굴욕케 한다. 거기에서 긴장이 생겨난다. 관심과 흥미도 생겨난다. 그는 꺾일 것인가? 마침내 굽히고 말 것인가?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에 굴복하고 말 것인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그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아마 그래서 어쩌면 지금쯤 드라마의 방향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까지의 자신의 출세만을 생각하던 계산적인 이강훈이 김상철의 영향으로 바뀌게 되는 시놉시스대로라면 이강훈은 패배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어 버렸다. 신하균의 필요 이상으로 뛰어난 연기와 작가의 배려가 상황을 그렇게 몰고가 버렸다. 그보다는 이강훈이 이강훈인 채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이제까지 감추어 왔던 자신을 이강훈답게 드러내는 쪽이 낫지 않겠는가? 어머니에 대해 오해한 것을 알고 나서도 이강훈의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이 이강훈다운 방식으로밖에는 나타날 수 없게 되는 것처럼. 이대로 이강훈을 변화시키기에는 이강훈이 겪은 고난이 너무 크다. 앞으로도 클 것이다. 자칫 이강훈의 굴복으로 비쳐질 수 있는 상황은 드라마가 주어야 할 카타르시스로부터 너무 거리가 멀다.
이강훈이 고재학과 서준석에게 한 방 먹이게 되는 줄 알았다. 아마 이강훈도 알았을 것이다. 고재학과 서준석과 함께 동승만이 나타났을 때. 저들이 과연 뒤에서 무엇을 꾸미고 준비하고 있는가. 그래서 한 방 먹였다. 자기가 먼저 논문을 완성해 발표함으로서. 그것은 김상철에 대한 어필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고재학의 감정을 자극해 그를 더욱 위험한 지경으로 내몰고 만다. 고재학의 거부로 인해 김상철은 마치 그러고 싶어도 그러지 못한다는 투로 그를 거부하고, 그로 하여금 더욱 굴욕적인 처지로 내몰도록 만든다. 작가가 S이거나 이강훈이 M이거나. 이렇게까지 주인공을 괴롭히는 드라마도 드물 것이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도 그럼에도 전혀 꺾일 것 같지 않은 이강훈의 강함 때문이겠지만. 신하균의 힘이 절대적이다.
이제는 솔직히 짜증이 나려 한다. 화가 나려고 한다. 너무 이입되어 버렸다. 언제쯤 이강훈은 지금의 어려운 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말했듯 이강훈이 바뀌는 건 바라지 않는다. 그것은 패배이고, 타협이고, 수용이다. 선이란 바로 강하기에 선인 것이다. 상황이 어렵고 불리하게 돌아가니 그에 맞게 자신을 바꾸고 맞춰간다. 그것은 선이 아니다. 비겁한 것이다. 김상철이 어머니를 살려줄 수 있을 것 같으니 김상철의 마음에 들려 자기를 굽히고 꺾는 것, 그것은 비굴한 것이다. 비굴하게 선량한 이는 결국 비굴하게 악해진다. 차라리 이강훈이 더 약하고 더 악한 인물이었다면 이강훈의 변신이 의미가 있겠지만, 더구나 이강훈이 너무 몰려 버렸다. 유일하게 가져보는 기대일 것이다.
갈수록 이강훈의 일인드라마가 되어 가고 있다. 신하균의 드라마가 되어 가고 있다. 결국 드라마가 이강훈과 그 주위와의 관계에만 의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의학드라마인데 정작 병이나 환자는 뒷전이다. 오로지 이강훈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캐릭터가 드러나고, 사건이 일어난다. 이강훈을 중심으로 인물들에 대한 호불호나 도덕적 판단이 이루어진다. 이강훈에게 거리를 두면 좋을 텐데 신하균의 연기와 이강훈의 매력이 그러지 못하게 만든다. 많이 아쉽지만 그럼에도 좋을 정도로 신하균의 연기와 존재감은 정말 대단하다. 이 드라마는 신하균의 드라마다. 좋지만 그것이 못내 아쉽다.
긴장을 놓지 않는다. 흥미를 놓지 않는다. 윤지혜와의 관계에서조차. 이강훈이 윤지혜에 대해 친절하게 대했을 때 이미 예상했어야 했는데. 이래저래 악운이 끊이지 않는 이강훈이다. 진심으로 동정한다. 필자 역시 요즘 악운이 끊이지 않고 있다. 동병상련일 것이다. 대신 울어주고 싶다. 진심이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07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일의 약속 - 비현실적인 침착함과 잔잔함, 미완의 비극으로 끝나다. (0) | 2011.12.21 |
---|---|
천일의 약속 - 이서연의 비극과 공포, 그러나 이서연의 병은 의식에서 사라지다. (0) | 2011.12.20 |
뱀파이어 검사 - 소녀와 뱀파이어, 소녀 연지와 뱀파이어 장철오... (0) | 2011.12.19 |
심야병원 - 걸작이 될 수 있었던 졸작, 시작의 참신함이 아깝다. (0) | 2011.12.18 |
특수사건전담반TEN - 소수의 폭력에 다수가 굴종하고 마는 이유... (0) | 2011.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