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불안요인으로 여겼던 것들이 바로 이런 부분들이다. 어린 허염(시완 분)의 등뒤에 후광이 비친다. 어린 세자 이훤(여진구 분)마저 그런 허염을 보는 순간 후광을 보고 눈이 부셔한다. 문무겸전에 용모수려, 아마 현대물이었다면 스포츠만능이 붙여졌을 것이다. 물론 남성취향의 작품에서도 그런 과장된 설정은 나타나지만 이것은 특히 순정물의 그것에 가깝다.
손발이 오그라들고 있었다. 만화로 볼 때는 상관이 없었다. 필자 역시 순정만화와 그 표현방식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의 3차원의 배우와 만났을 때 상당히 민망하게 작용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맛의 달인>이라고 하는 만화에서 요리를 먹고 내뱉는 감탄사를 실제의 배우가 똑같이 대사로 들려주고 있을 때의 위화감과 같은 것일 게다. 이건 정말 견디기 쉽지 않다.
확실히 판타지였을 것이다. 원래 판타지라는 것이 그렇다. 그것은 추구다. 지향이다. 이상이다. 현실에 없는 것이다. 등뒤로 후광이 비칠 정도로 잘난 사내다. 기녀를 이유로 시비가 붙었다가도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바로 친구가 되고 싶어지는 그런 대단하게 잘난 사내다. 과연 그런 남자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하기는 고작 13살의 나이에 한 나라의 세자와 그의 서형인 왕의 서장자를 모두 반하게 만들 수 있는 매력이 어린 연우(김유정 분)에게는 있다.
거기에는 논리따위는 없다. 합리며 개연성도 없다. 그러면 된다. 허염은 그렇게 대단한 사내이고, 연우는 그렇게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그게 중요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가 아니라 바로 그러하다가 중요하다. 조선이 그러하고, 왕이 그러하며, 대왕대비(김영애 분)와 권신 윤대형(김응수 분)이 그러하다. 무녀가 있고 어려서부터 자연스러운 만남이 있다. 연우는 운명처럼 세자를 만나고, 운명처럼 양명군은 연우에게 이끌리고, 허염과 세자는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또다른 운명을 지닌 윤대형의 딸 어린 윤보경(김소현 분)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은 극적인 것이다. 우연처럼 찾아와서 필연처럼 이어진다. 그래서 운명이다. 그래서 무녀가 있다. 그래서 우연한 만남을 위한 장치들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벌써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조건들이 있다. 윤보경의 악역은 그래서 더욱 선명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장애가 없다면 사랑은 불타오르지 않는다. 드라마가 없는 사랑은 운명적이지 않다.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조선이라는 배경도, 왕이며 세자라고 하는 신분들도, 우연한 만남들도, 그 만남을 위한 자리들도, 상당히 뻔뻔하다. 그러나 상상에는 염치란 없다. 쾌락이란 원래 무례한 것이다. 오로지 쾌락 그 자체만을 추구하려 든다. 일본에서 시작된 순정과 서구에서 비롯된 로맨스가 갖는 결정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아니 로맨스가 여타의 문학들과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그 가운데 가장 극단적인 것이 바로 순정이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한국의 순정은 가장 선명한 것으로써 다른 것은 모조리 무시하는 극단적인 지향성을 보인다. 1월 5일 2화에서 본 그대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특정 취향의 극단적인 지향성이 얼마나 시청자를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바로 그런 점에서도 드라마의 강점을 드러나고 있을 것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데 그러나 정작 <해를 품은 달>이라고 하는 드라마 하나만을 놓고 보았을 때는 그것이 그렇게까지 민망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드라마 속은 철저히 별개의 세계다. 그곳은 그곳만의 별개의 독립된 논리로서 존재하고 돌아간다. 그곳을 현실과 잇는 것은 김영애와 임응수, 안내상(성조대왕 역)과 같은 빼어난 중견의 연기자들이다. 어쩌면 유치하기까지 한 극단적 설정과 그럼에도 그 안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배우의 연기, 동의할 수만 있다면 잠시 유치해지는 가운데 그 판타지에 빠져보는 것도 좋다.
더구나 다행스러운 것은 순정풍의 극단적인 묘사가 단지 남성캐릭터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여성 시청자의 문법이다. 남성시청자들은 그런 식으로 과장된 이성의 캐릭터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남성시청자들에게 있어 판타지란 캐릭터의 뒤에서 비치는 후광이 아니라 그의 실제적인 매력이다. 남성의 이성관은 상당히 속물적이다. 그 역시 소녀취향과 소년취향의 차이일 것이다. 여성 캐릭터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좋다. 과연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
미묘하다. 하지만 통쾌하기도 하다. 차라리 이것저것 시청자의 눈치를 보느라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면 이렇게 솔직하게 허구의 판타지에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대를 보려 했을 것이고, 사람들을 보려 했을 것이고, 그것을 납득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오로지 한 가지에만 집중한다. 얼마나 연우와 세자 이훤의 사랑을, 그 주위의 관계를, 운명적으로 아름답게 그려낼 것인가? 사랑이라고 하는 판타지를 얼마나 충분히 납득하도록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동의한다면 재미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허황될 뿐이다.
아무튼 미묘하다. 원작을 읽은 적이 있었다. 오래전이다. 인상도 그다지 깊지 않다. 다만 순정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상당히 우울한 청승맞은 신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에 비하면 드라마는 한결 밝다. 한결 밝은 가운데 이것은 드라마일 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역시 제작진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시청자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는 판타지를 시청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연출해 보여준다. 다만 드라마 초반 무녀 아리(장영남 분)가 죽는 장면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장하게 연출된 것은 그만큼 신파가 한국의 대중적 정서와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은 유치한 어리광스러운 신파다. 시청률이 높게 나왔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 받아들여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람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재미있게 보고 있다.
궁궐 안에서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장면이 보인다. 역시 로맨스의 단골인 가면무도회의 한 장면일 것이다. 왕자나 공주의 말벗을 하려 사대부의 자식이 궁궐에 들어가는 설정 역시 상당히 유럽의 전통을 의식한 것이다. 귀족의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주군의 궁정에 들어가 귀족으로서의 예법과 기사로서의 소양을 익히게 된다. 그래도 사대부로서 활쏘기보다는 칼쓰기를 익히고 있는 것도 상당히 이질적이다. 하기는 세자가 감히 조정이 정해준 스승으로부터 배우기를 거부할 수 있는 무모함이야 말로 이 드라마의 배경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조선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세자는 바로 폐세자되었다. 조선은 그렇게 왕권이 강한 나라가 아니었다. 역시 오로지 로맨스와 판타지만을 위한 설정일 것이다. 나름의 미학이 있다. 로맨스란 이런 것이다.
대충의 시대를 추측해 본다. 전횡을 휘두르는 대비가 있다. 훈신이 있고 척신이 있다. 척신의 대표가 하필 윤대형이다. 더오르는 이름이 있다. 허염과 허연우의 아버지인 허영재는 그런 점에서 훈척과 대립하던 사림을 떠오르게 만든다. 훈척들이 자신들에 방해가 되는 종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의 후손들을 공격한 것이 중종연간이었다. 얼추 중종에서 명종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이 그 모델이 되지 않았을까? 물론 그 대부분의 문화나 전통은 로맨스에서 왔다. 역사물이 아니라 로맨스물이다.
재미있기는 하다. 원래 이렇게 오그라드는 맛으로 보는 것일 게다. 남의 사랑 이야기란 이렇게 오그라드는 맛에 안달하며 듣게 되는 것이다. 양명과 이훤의 삼각관계가 만들어지고, 오라비 허염이 이훤과 이어지고, 이제는 라이벌 윤보경까지 나왔다. 대충이 그려지지만 그래도 역시 직접 보는 맛은 별개다. 아직까지 주요인물들의 캐릭터조차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신선하다. 발칙하고 도발적이다. 그리고 순수하고 올곧다. 매력적인 주인공들이 아름다운 사랑을 나눈다. 운명적이고 극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언뜻 비슷한 허구의 세계에서 상상이라는 자유의 나래를 달고 마음껏 펼쳐지고 있다. 다만 역시 얼마나 그것이 시각화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보이는 것이 아름다워야 한다. 본능이 이끌려야 한다. 이치로 따지는 드라마가 아니다. 지켜본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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