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TV손자병법>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이미 중견을 넘어 원로라 부리울 나이가 되어 가고 있는 서인석, 장용 등의 배우들이 유비와 장비 등의 삼국지의 인물들의 이름을 가지고 나와 샐러리맨으로서의 애환과 처세의 비결을 코믹하게 다룬 드라마였다.
처음 <샐러리맨 초한지>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기대하던 것이었다. 샐러리맨의 애환과 성공스토리를 그린다. 유방이 나올 테고, 항우가 나올 테고, 그러면서 일반 샐러리맨들이 경험하는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와 야망과 성공의 드라마가 펼쳐질 것이다. 아마 <TV손자병법>보다 조금 더 극적인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역시 그때의 인상이 너무 강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이미 드라마는 샐러리맨 어쩌고 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었다. 유방(이범수 분)이 천하그룹에 입사하기까지는 그럭저럭 아무것도 가진 것이라고는 없이 별 볼 일 없는 비주류의 인물이 거대기업에 입사하는 스토리로서 의미가 있었다. 과연 액면도 스펙도 없는 유방이라는 인물이 굴지의 대기업에 입사해 성공가도를 달리자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비현실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코믹한 분위기에 걸맞는 우스꽝스러운 과장된 설정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과연 어디에 샐러리맨이 있는가? 어디에 샐러리맨의 애환이 있을까? 물론 멀쩡한 겉모습과는 달리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이유로 아무 거리낌없이 돈을 요구하는 가족과 그를 원망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라면으로 연명해야 하는 차우희(홍수현 분)의 처지는 참으로 안쓰럽다. 하기는 유방 역시 여전히 고시원신세다. 어머니는 병으로 몸이 불편하고 그것이 걱정되는데도 감히 찾아볼 엄두도 못낸다. 서울로 모시고 와 함께 살 현편도 못된다. 시키면 시키는대로 해야 하고, 큰 맘 먹고 욕심을 부려보았자 더 위에 있는 인간들에게는 그저 우습게 이용당할 뿐이다.
"이건 잘난 놈들 집안싸움이유! 잡힌다고 부사장 감빵에 쳐넣을 것 같아요? 우희씨만 독박쓰고 감빵 가는 기유!"
하지만 그럼에도 유방의 저러한 외침이 공허하게만 들리는 것은, 그러나 유방 역시 아직 천하그룹에 입사해서 제대로 월급쟁이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처지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입사해서, 벌써부터 회장의 외손녀를 전담하는 역할을 맡고, 더구나 천하그룹과 장초그룹이라고 하는 대기업 사이의 분쟁이 깊이 개입해 있다. 유방이 사는 세계도 결국 일반 샐러리맨의 세계는 아니다. 그가 추구하는 세계 역시 그러한 샐러리맨의 세계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말하는 샐러리맨의 처지가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가?
그나마 유방을 제외하고 과연 샐러리맨이라 할 만한 사람이 누가 나오는가? 역시나 우울한 처지의 차우희 말고 번쾌(윤용현 분) 정도가 고작이다. 가장 샐러리맨다운 사람이다. 위에 치이느라 눈치보이고, 아래에 치이느라 골치아프고, 그럼에도 월급쟁이이니 어떻게든 종합영양제를 먹어가면서 시키는 일은 한다. 그에 비하면 여전히 국정원 직원이라 여기고 있는 한신의 지시를 받아 스파이노릇을 하는 유방은 무엇인가? 요즘은 스파이도 월급쟁이라 부르는가?
장량(김일우 분)도, 범증(이기영 분)도, 항량(장현성 분)도 모두 이사로 임원들이다. 임원은 샐러리맨이 아니다. 항우(정겨운 분) 역시 진초그룹의 본부장으로 오히려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다. 백여치(정려원 분)가 평사원으로 입사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회장의 외손녀를 평사원으로 여기고 대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다못해 그들의 명령을 받아 따르는 직원조차 한신과 번쾌를 제외하면 유방 정도가 고작이다. 하기는 그래서 유방도 샐러리맨일 수 있는 것일 게다.
물론 드라마는 재미있다. 유쾌하다. 긴장감도 있다. 기업과 기업간의 전쟁이라는 소재도 흥미롭다. 정려원의 거리낌없이 망가지는 코믹연기는 상당히 파격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드라마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특별한 위치와 신분의 사람들이 나와 보여주는 긴장감 넘치는 거대서사인가? 아니면 샐러리맨을 주인공으로 한 일상과 성공의 이야기인가? 대기업간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드라마의 틈바구니에서 우연처럼 성공을 거두는 한 개인의 판타지인가? 드라마의 가장 큰 단점일 것이다. 기획의도와 드라마의 내용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말했듯 드라마는 무척 재미있다. 하나하나가 무척 흥미롭다. 그러나 항상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이 있다. 어째서 제목이 '샐러리맨' 초한지인가? 굳이 앞에 샐러리맨을 붙일 필요가 있었을까? 샐러리맨 아니고서도 다른 괜찮은 말도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샐러리맨'이라는 단어가 기획의도와 더불어 불필요한 선입견을 만들고 드라마로부터 괴리감마저 느끼게 한다. 차라리 제목을 다르게 쓰고 그저 단지 기업판타지일 뿐이라고 설명했다면 온전히 드라마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을. 그러나 샐러리맨이라는 단어를 담아내기에는 드라마의 스케일이 너무 커졌다.
드라마와는 별개의 기획과 전략의 실수라 생각한다. 실패까지는 아니다. 실패라기에는 드라마 자체는 아주 잘 만들어졌다. 흥미롭고 재미있다. 다시 보고 싶어진다. 배우들 면면도 훌륭하고 캐릭터도 매력적이다. 사건들도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즉 그 선입견이 문제인 것이다. 제목이 주는 위화간과 괴리감이 드라마의 가치를 깎아먹고 있다. 평가를 해친다. 재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아무튼 드라마는 갈수록 흥미를 더하고 있다. 천하그룹의 사운을 건 불로불사프로젝트와 그것을 망치려는 진초그룹의 음모, 그 결과 항우는 우희를 이용해 천하그룹의 연구소를 불태우고, 바로 직전 우희는 회장의 아들인 호해(박상면 분)와의 거래를 받아들여 약을 빼돌림으로써 분쟁의 씨앗을 만든다. 물론 그 약이 하필 유방의 가방에 들어가 있는 것은 상당히 진부한 설정이라 할 수 있겠지만, 묘하게 B급스러운 소품의 느낌 가운데 항량이 호해를 죽이고 그것을 유방과 백여치에게 뒤집어씌우기까지의 과정이 숨가쁘게 진행된다. 과연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우희가 빼돌린 약으로 인해 물고 물리며 엎치락뒤치락 반전이 이어진다. 충분히 재미있다. 단지 재미를 위한 드라마로서는 이 이상은 없을 것 같을 정도다. 웃음이 있고 진장이 있고 통쾌함도 있다. 다만 그 이상은 없다는 점에서 다시 한 번 제목과 기획의도의 문제를 지적하게 된다. 더 이상 없는 것들에 대해 무리하게 기대하게 만들고 실망하게 만든다.
더구나 과연 진시황(이덕화 분) 회장과 항우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복선이라기에는 젊은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는 진시황 회장의 말이 너무 뻔하게 걸린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여기까지 와서 출생의 비밀까지 나오게 된다면 드라마가 너무 한심해질 것 같다. 백여치가 진시황 회장을 원망하는 이유에서도 진부함을 느꼈는데, 여기서까지 쉽게 가려 한다면 너무 유치해진다. 유치함과 유쾌함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익숙함과도 매우 가깝다. 그 선을 지키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 지금으로서는 매우 아슬아슬하다. 또 하나 지적할 불안요인이다.
재미있는 드라마를 더 재미있게 온전히 집중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결국 제작진의 역량일 것이다. 시청자와의 약속이랄 수 있는 기획의도라든가, 드라마의 대략적인 내용을 기대하게 만드는 제목, 그리고 적절히 익숙함과 생경함으로 지루하지 않게 시청자의 관심을 움직이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대중을 매료시키는 기술이다. 그 점에서 부족함을 느낀다. 드라마에 온전히 몰입해 보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조금만 더 세삼한 주의를 기울였으면.
심기일전한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마음을 다시 다잡아 먹는다. 이 드라마는 샐러리맨의 일상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다. 기획의도나 제목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재미있다. 더 이상의 그와 관련한 의문은 의미없다. 아쉬움이 크다. 제목이 참 멋있었다. 실망을 머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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