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특수사건전담반TEN - 불완전한 결말, 드라마는 드라마로서 완결되어야 한다.

까칠부 2012. 1. 15. 20:21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고 위정자는 백성과 다투지 않는다. 학생과 싸우는 선생은 그다지 자격이 없는 것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했을 때 그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결과로서 돌아온다. 사람이 싸우게 되는 것은 그 하고자 하는 바를 다 하지 못했을 때 마침내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워낙 드라마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도 홈페이지조차 찾아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오로지 드라마를 통해서만 모든 것을 보려 하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품 안에서 완결되어야 한다. 그 밖의 모든 말은 사족일 뿐이다. 작품을 통해 다 하지 못한 말이란 작품 안에서 완결짓지 못한 작가의 나머지에 불과하다. 그것은 실수이며 실패다.

 

물론 요즘에는 인터넷이 생활화되어 홈페이지를 찾는 것도 쉽고 언론을 통해 나오는 기사를 찾아 읽는 것은 더욱 쉽다. 그런 것들을 찾아 보게 되면 어쩌면 드라마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다지 그같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단지 드라마를 드라마로서만 즐기려 할 것이다. 드라마가 TV를 통해 보여지는 순간에만 집중하며 그로부터 만족을 얻으려 한다. 과연 보지도 않을 홈페이지와 언론의 기사가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를테면 그런 만화가 있다. 본편보다는 설정집이 더 유명하다. 본편의 줄거리보다는 따로 발매되는 설정집의 내용이 더 관심의 대상이 된다. 어느날 지인이 그 만화를 보고 필자에게 그리 하소연한 적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지인의 잘못이었을까? 그날 필자는 그 만화에 대한 모든 설정자료를 폐기했다. 독자가 읽고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이 아니다. 굳이 설정집을 통해 이해를 강매하려는 것은 작가의 태도가 아니다. 완고함일 수도 있다.

 

솔직히 필자 역시 <특수사건전담반TEN>의 마지막회를 보도 무척당황했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도로 이와 같이 마지막 장면을 연출한 것일까? 한참을 고민했다. 머리를 굴리고 답을 찾았다. 몇 번을 반복해서 보았는가 모르겠다. 보고 또 보고, 그러면서 나름의 답을 찾아 맞춰보고. 하지만 재미있었다. 왜냐면 그 또한 드라마를 보는 한 재미일 테니까. 열린 결말일 것이다. 아니면 불친절함일 것이다. 어차피 시즌2도 있으니 그때 답을 보여주겠다. 기대가 생긴다. 시즌2가 시작되면 답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즐겁기도 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작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제작진의 설득이 이어졌다. 그런 것이 아니다. 범인이 누구인가 이미 드라마를 통해 충분히 그 단서를 전한 바 있다. 드라마를 주의깊게 살펴보면 그 범인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이해하기 힘든 결말에 대한 시청자의 불만을 다독이기 위한 말이었을 테지만, 그러나 그것은 마치 시청자에게 싸우자는 말처럼 들렸다. 나는 이렇게성의껏 모든 것을 준비해 보여주었는데 시청자는 어째서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가? 그러면 굳이 그것을 알아보았어야 했는가?

 

왜 농부는 땅을 탓하면 안되는가? 벼를 심어야 하는 땅이 있고 콩을 심어야 하는 땅이 있다. 날이 가물면 가문대로 비가 많이 오면 많이 오는대로 그에 맞춰 농사법을 달리해야 한다. 위정자가 스스로 정치를 잘한다고 해서 잘한 정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백성이 진심으로 바라지 않고 동의하지 않으면 그것은 독선이 되고 독단이 된다. 이해하지 못할 소리를 늘어놓고서 학생들만을 탓하려는 선생님에게 자격이 없는 것과 같다.

 

과연 누구더러 보라는 드라마인가?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드라마인가?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주고자 하는가? 무엇을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고 전달하고자 하는가? 다만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드라마라는 것은 보편의 기준에 충실해야 한다. 굳이 특정하지 않는 보편의 시각에 맞춰 보여주고 전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것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말한다. 실패인 것이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하는 근본적 소통에 실패했다. 대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수단을 바르게 선택하지 못했고, 그 결과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하지 못했다. 실패가 아닐까?

 

그래서 말이 나오는 것이다. 드라마로 다하지 못한 말이 넘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어느새 소통에 실패함에 따라 일방적인 설득이 시작되고 마는 것이다. 원래는 이런 것이다. 이런 의도였다. 변명이다. 사족이다. 어째서 시청자는 드라마를 보고 나서 제작진의 말을 또다시 들어야 하는가? 굳이 그렇게 해가면서까지 드라마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가. 마치 수업받는 학생 같다. 마치 학생과 싸워 이기려는 선생님과 같다. 불쾌함의 이유다. 그것을 보지 못한 내가 잘못한 것 같다.

 

드라마는 드라마로서 완결되어야 한다. 만일 그러지 못했다면 그것은 실패한 것이다. 실패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이 져야 한다. 충분히 의도한 바가 전달되지 못했다. 제작진의 미숙함이었다. 제작진이 미처 그런 부분을 고려하지 못했다. 애써 잘 만들었는데 알아주지 않는다는 하소연은 굳이 의미가 없다. 이해는 드라마를 통해 구하는 것이지 말로써 구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제작진 아닌가? 칼럼니스트나 논객이 아니라 말이다.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서 말한다. 그것이 드라마다.

 

인터넷이 너무 활성화되었다. 주변정보들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서 작가들도 무성의해졌다. 굳이 드라마를 통하지 않고서도 전할 수 있는 수단이 많다. 하지만 드라마만 보고 마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소외시킬가? 드라마를 보아주는 시청자일 텐데? 그런데 지나치게 넘쳐나는 정보들이 착각하게 만든다. 그같은 정보들이 드라마를 대신할 수 있다. 착각이다.

 

실망이 크다. 너무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인 만큼 제작진의 안이함과 에고가 반전처럼 실망을 더한다. 설마 스스로 'F'라도 된 것처럼 자신들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한 시청자에 우월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시청자를 보며 통쾌해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런 것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시청자에 한심함을 느끼는 것인가? 나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작품 안에 작가가 의도한 바를 모두 담아낸다. 지나면 후회한다. 아쉬움만 남는다. 하지만 그래서 작품이다. 그래서 작품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비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다. 작품 안에 작가가 의도한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굳이 작가의 입을 통해서밖에 이해하지 못할 작품이라면 작품으로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설사 충분히 의도한 바를 전달하는데 실패했더라도 그대로 대중에 맡기는 것이 작가의 자세다. 그것이 작품이다.

 

오해했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렇게 보여졌다. 그 또한 대중의 몫이다. 만들기는 작가가 만들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대중에 달려 있다. 그까지도 하나로 아우르는 것지 작품이다. 작가의 역할은 작품을 완성해 보여주는 순간 끝난 것이다. 그래서 아쉬운 것이다. 자기부정이다.

 

아쉽다. 뱀의 꼬리가 아니라 꼬리가 싹둑 잘린 느낌이다. 이상하기는 해도 나름대로 귀여웠는데 꼬리가 사라지니 이건 과연 용인가? 머리만 내걸려 있다. 머리는 과연 진짜인가? 과연 앞으로도 기대하고 보아도 좋은가? 반성이 없다면 발전도 없다. 기대도 없다. 말이 넘쳤다. 진심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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