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바로 앞에서 멈추고야 말았다. 하기는 공중파드라마다. 그것도 국영방송이다. 아무리 드라마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면이라 할지라도 근친에 의한 비속살인을 보여준다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친부자지간이다. 친아버지와 친아들이다. 비록 단지 시도에 그칠 뿐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패륜이다. 불특정다수의 시청자들에 보여질 것이 못된다.
그래서 멈추고 만다. 진노식(김영철 분)의 김선우(엄태웅 분)에 대한 의심은 의심으로 그치고 만다. 오히려 그것을 핑계로 진노식은 김선우를 다시 만난다. 다시 만나 김선우로부터 안마까지 받는다. 그 순간의 표정이 참으로 미묘하다. 이장일(이준혁 분)이 김선우의 눈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이용배(이원종 분)에게 묻는 순간에도 수많은 감정이 그의 표정을 스치고 지나간다. 과연 김영철이다. 진노식이 김선우에 대해 갖는 미묘한 감정들이 김영철의 미묘한 표정변화를 통해 그대로 전해진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패륜에서 그 또한 약한 인간이기에 저지를 수밖에 없는 애증의 죄를 보여준다. 더 큰 비극을 기대했지만 그래서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만다.
어쩌면 김선우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도 그를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원래는 진노식이 그리했어야 했다. 지금껏 김선우를 길러온 아버지 김경필을 죽인 순간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려 애쓰는 김선우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진노식으로서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진노식이 직접 손을 쓰기 전에 이장일이 대신해서 처리해 버리고 말았다. 김선우로서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친아버지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는 최악의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을 죽일 수 없지만 친구는 얼마든지 자신의 친구를 배신할 수 있다. 아버지로부터 목숨을 위협받기보다 친구로 인해 죽음의 위기를 넘기는 쪽이 낫다. 눈까지 멀어 전혀 앞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경계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게 납득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진노식이나 이준혁이나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있다.
복수가 아닌 응징이다. 복수가 아닌 심판이다. 복수란 악의에 대한 것이다. 자신과 주위에 대한 악의에 대해 악의로서 맞서는 것이다. 응징이란 죄에 대한 것이다. 심판이란 죄를 계량하여 그 댓가를 치르도록 하는 것이다. 진노식은 악인가? 아니면 이장일이 악인가? 이용배는 과연 악한가? 최수미(임정은 분)는 어떠한가? 최광춘(이재용 분) 또한 선한 사람이다. 단지 그는 약하다. 약하기 때문에 비겁하고, 비겁하기 때문에 쉽게 유혹에 넘어간다. 김선우를 향한 최광춘의 걱정이나 배려도 역시 진심이지만, 그럼에도 김선우가 그토록 찾고 있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감추고 그것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모습 또한 그의 진심이다. 둘이 아니다. 그는 선하지만 또한 악하다.
과연 진노식이란 사이코패스인가? 이장일이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소시오패스인가? 사람은 악해서만 죄를 짓지 않는다. 반드시 사이코패스이거나 소시오패스여서 죄를 짓지도 않는다. 착한 사람도 죄를 짓는다. 착한 사람도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얼마든지 착한 채로도 죄를 저지르고 만다. 이용배가 아직 살아있던 김경필의 마지막 숨을 끊은 이유였다. 아들을 위해서. 아들의 장래를 위해서. 그래서 잠시 양심으로부터 눈을 돌린다. 그토록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면서도,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래서 그는 주저함이 없다. 악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악에 물들도록 만든다. 진노식의 과거 나약함이 질투가 되고 증오가 되었듯이, 자신의 나약함에서 비롯된 죄로 인해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마는 것처럼. 그를 괴물로 만든 것도 자신의 죄이며, 그 죄를 저지르게 만든 자신의 나약함이다.
이장일이 거울을 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본다. 그리고 주문처럼 되뇌인다. 친구잖아. 네 친구잖아.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 자기는 전혀 그런 적이 없다고. 오랜 친구처럼. 오래전의 오랜 친구의 모습이 되어. 연습이다. 훈련이다. 그렇게 납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믿고 싶은 것이다. 자신의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와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지은 죄를 합리화한다. 익숙해진다. 길들여진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는 혼란의 와중에 있다. 죄가 무겁다. 죄가 무섭다. 김선우를 보기에 미안하고, 그러면서도 그렇게까지 되도록 만든 김선우가 원망스럽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생각한다. 한지원(이보영 분)에 대한 집착과 함께 다시 한 번 자신의 이기가 드러난다. 김선우에게 진심인 척 전하는 가식들이 증오스럽고 혐오스럽다. 최수미는 그런 자신의 거울이다. 또다른 이장일 자신이다. 최수미와 함께 지낸 하룻밤은 그런 자신에 대한 경멸이다. 그는 최수미를 사랑할 수 없다. 최수미가 그를 사랑하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그는 최수미를 사랑할 수 없다. 최수미가 사랑하는 자신을 스스로가 견딜 수 없으므로. 아직은 그는 그런 경계에 서 있다.
이장일과 김선우가 나란히 선다. 벤치에 앉아 고뇌하던 김선우가 마침내 걸음을 떼놓기 시작했을 때 이장일 역시 그가 보이는 곳에서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평행이다. 그들의 운명이다. 그를 곁눈질하며 그는 김선우가 보이는 곳에서 결코 마주칠 수 없는 평행선을 걷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그들은 멀어져 있다. 진노식도, 이용배도, 그리고 최수미와 최광춘 모녀도, 결국은 자신들의 나약함으로 인한 추악한 자신들의 모습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김선우가 다시 돌아왔을 때. 다시 돌아온 김선우의 심판에 의해. 누군가는 후회할 것이고, 누군가는 반성할 것이며, 누군가는 끝까지 발버둥치리라. 나약한 만큼. 그리고 강한 만큼.
최수미가 가져간 김선우의 점자가 하나의 단서가 될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김선우가 기록한 진노식과 이장일의 죄에 대한 증언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최수미에 의해 화폭에 옮겨져 사람들에게 보여진다.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까? 그녀가 이장일로부터 받은 모욕과 모멸감, 그리고 그럼에도 더욱 이장일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뒤틀린 욕망과 열등감에 의해. 우정과 사랑의 경계에서 욕망과 죄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녀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될까?
김선우와 한지원도 엇갈린 운명을 걷게 된다. 한지원에게 김선우는 운명이었지만 김선우에게 한지원이란 짐이었다. 한지원은 김선우를 품에 안을 수 있지만 김선우는 지금 자신을 지탱하는 것조차 버겁고 두렵다. 무엇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 더구나 오히려 그녀에게 해만 끼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를 지탱하고 있는 자신과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한이 그녀를 떠밀게 한다. 진심이기에 그는 더욱 한지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한지원이 알 수 없는 것이다. 김선우의 등뒤로 서로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스쳐지나간다. 공연장에서 그들은 스쳐지나가면서도 서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서로를 보지 못한다. 먼 여행을 떠나야 한다.
마침내 문태주(정호빈 분)와 김선우가 만난다. 절망에 신음하는 김선우를 문태주가 찾아간다. 거짓된 진실로 문태주는 김선우의 아버지가 된다. 또 한 사람의 아버지가 되어 그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한다. 낳아준 아버지와 길러준 아버지와 새 삶을 준 아버지. 세 사람의 아버지와 함께 다시 한 번의 운명이 시작된다. 복수일까? 증오일까? 아니면 화해일까? 죄와 악에 대해서. 깊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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