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적도의 남자 - 악인의 분노, 혼자서만 피해자인 척 엄살피우지 말라!

까칠부 2012. 5. 11. 09:20

용서해 준다고 말한다.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네가 뭔데? 한지원(이보영 분)에게 김선우(엄태웅 분)더러 자기만 피해자인 척 엄살부리지 말라 한 것은 이장일(이준혁 분) 자신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자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돌아갈 수조차 없다.


필사적으로 악해져 왔다. 자신의 죄로 인해. 그 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끊임없이 변명하고 자기를 속여왔다. 자기를 속이고 버려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용서해 줄 수 있다 말한다. 솔직하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친구였던 김선우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 굴욕적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화가 난다. 너따위가. 이제는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무표정이 마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다. 멍하니 초점없이 바라보는 시선이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과도 같다. 검사로서 자기가 이룬 보람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돌려본다.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듯. 이제는 잃어버리고 없는 것들을 추억하듯. 아마 TV속 화면이 노란 비가 내리는 흑백의 영상이었으면 더 어울렸을 것이다. 투정부리는 아이와도 같았다. 아니 투정부리며 고집을 세우는 노인의 모습이기도 했다. 과연 김선우가 자신을 뒤에서 내리친 범인의 이름을 밝히겠다 했을 때 이장일의 입가에 떠돌던 미소는 무슨 의미였을까?


명예란 존엄이다. 존엄이란 존재다. 그는 검사다. 법과 정의를 지키는 존재다. 그렇게 여겨왔다. 그렇게 지금껏 검사로서 살아왔다. 그것을 더럽혔다. 그것을 저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이란 무엇이 있는가? 허튼 고집과 오기다. 여기까지 왔으니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이 자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그로써 죄인은 악인이 된다. 죄를 짓는다고 모두가 악인인 것은 아니다. 죄를 인정한다. 죄를 긍정해 버린다. 죄를 짓는 자신을 받아들여 버린다. 선이란 모두가 바라는 것이지만. 존엄과 양심은 누구나 지치고 싶어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더 이상 자기에게는 그럴 자격도 그럴 의미도 없다. 하찮다. 쓰레기다. 자기 자신을 악취나는 시궁창에 처박아 버린다. 그것을 흔히 자포자기라 말한다.


진노식(김영철 분) 회장의 마음속에 있다고 하는 커다란 동굴이라는 것도 같은 의미일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은 강하다. 그러나 정작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은 약해진다. 약한 이는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자기를 함부로 내던진다. 후회도 죄책감도 그것을 느낄 자신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다. 그것을 느낄 자신이 없다면 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그렇게 진노식은 살아왔고 이장일은 살아가려 한다. 영혼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오로지 프로그램된 본능과 욕망만이 그에게는 남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악인이다. 죄를 지어서 악인이 아니라 그 죄를 받아들여버린 때문이다. 


한지원이 끝까지 김선우를 말리려 하는 이유다. 한지원과 최수미(임정은 분)의 선택은 다르다. 물론 한지원이나 최수미나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다만 차이가 있다. 한지원이 지키고 싶어하는 것은 김선우라고 하는 본질이다. 그의 내면이며 그의 존재 자체다. 최수미가 지키려 하는 것은 자신의 극사실주의 화폭에 담긴 이장일의 모습 자체다. 하기는 김선우의 존재 자체를 느낄 수 있는 한지원에 비해 최수미는 단지 그림속에 담긴 모습처럼 자신의 눈에 비쳐진 이장일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장일을 가엾게 여기면서도 그녀의 손은 이장일의 내면에까지 미치지 않는다. 김선우를 친구라 생각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한다. 눈물은 그런 비루한 자신에 대한 연민이며 경멸이다. 함께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사랑일 것이다. 


진노식과 이장일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김선우가 자신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복수란 정의가 아니다. 단순한 한풀이다. 응어리진 원한을 대신해 풀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이미 저질러진 일이 없었던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맺힌 것을 풀어냈다는 후련함조차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자신을 잃고 혹은 스스로가 불행해진다면 그렇게 해서 복수를 하는 의미란 어디에 있는가? 한지원은 그런 김선우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런 김선우에게 안타까움과 연민을 느낀다. 어떤 경우에라도 한지원 그녀는 김선우의 곁에 머물러 있으리라.


자신을 잃어버린 거짓의 껍데기에게 김선우가 거짓으로 유혹해 온다. 이장일 자신이 믿고 싶은 진실을 전해준다. 김선우의 아버지 김경필을 죽인 것은 자신의 아버지 이용배(이원종 분)가 아닌 진노식 회장 자신이다. 그가 죽였가. 그가 모든 죄를 지었다. 아버지는 무죄돠. 아버지는 죄가 없다. 어쩌면 용서보다 더욱 간절하게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었을 게다. 어차피 거짓으로 덧씌워진 그에게 있어 더 이상 진실이란 아무 의미도 없으므로. 진노식을 배신한다는 생각도 없다. 배신이란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김선우에게 숨은 의도가 있음을 알면서도 기계적인 웃음을 보이며 그 의도에 넘어가고 만다. 아무려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초반 김선우와 마주한 진노식의 절절한 분노가 더욱 깊이 와닿는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겠다 했을 때 과연 진노식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더구나 김선우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다름아닌 자신이 아닌 죽은 김경필이었다고 말한다. 자기의 아들일지도 모름에도. 잊혀진다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철저히 무시당한다. 철저히 그 존재를 부정당한다. 사실 다른 도발도 필요없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진노식은 스스로 함정으로 걸어들어간다.


아무튼 최수미란 과연 극사실주의 화가일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외면하려 해도 자신의 화폭에 담긴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무리 진실을 감추고 거짓으로 꾸미려 해도 눈으로 직접 본 그 사실만큼은 결코 바뀔 수 없다. 그녀는 진실을 피해 홍콩으로 떠나지만 그녀가 보았던 사실들은 남아 당시를 증언한다. 당시를 증언하는 수단이 되어 준다. 주관을 배제한 엄격한 사실이야 말로 극사실주의가 추구하던 바일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부정했고 그림이 그녀를 증명했다.


시험은 이제 모두 끝났다. 이장일에 대한 김선우의 마지막 시험마저 끝나며 이제 본격적인 심판이 시작될 것이다. 단순한 복수가 될 것인가? 아니면 어긋난 것을 바로세우는 진정한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인가? 복수란 증오가 수단이고, 심판이란 정의가 수단이다. 복수의 끝에는 원수의 파멸이 있고, 심판의 끝에는 보다 냉엄한 진실이 있다. 아니 어쩌면 진실이야 말로 가장 큰 복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은 복수를 하지 않고 심판을 한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추악한 모습을 돌아보도록 만든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과연 통쾌함일까? 아니면 시린 냉정함일까?


이용배가 마지막 반전을 이룰 듯 보인다. 이용배의 아들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다시금 이장일의 연민과 만나게 된다. 이장일의 연민과 만나며 다시 한 번 김선우와 마주하게 만든다. 김선우는 또한 아버지 진노식을 마주하게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하는 운명의 비극을 만난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 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고 다른 아버지가 아들을 지킨다. 그들이 마지막에 보게 될 진실이란 과연 무엇일까?


무겁다. 차라리 통쾌한 복수물이었다면 후련하기라도 했을 것이다. 단지 악인이어서 복수한다. 악인이기에 정의의 이름으로 응징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주인공은 김선우가 아니다. 물론 이장일도 진노식도 아니다. 인간의 죄다. 인간의 악이다. 인간의 존엄과 양심이다. 무섭다. 두렵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