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각시탈 - 식민지조선의 냉혹한 현실, 네가 누구든 조센징 아냐?

까칠부 2012. 7. 20. 08:41

콘노 코지(김응수 분)가 담사리(전노민 분)에게 말한다.

 

"철모르는 애들이 열정에 휩쓸리는 것도 아니고, 이제 좀 그만할 때도 안 되었소?"

 

아예 점잖게 타이르는 말투다.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짓은 그만두고 어른답게 현명하게 처신하라. 심지어 진심으로 담사리와 그 딸 목단(진세연 분)을 걱정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앞날이 창창한 년이 아깝지도 않아?"

 

콘노 코지가 시킨대로 스스로 대못상자로 들어가려는 목단을 말리며 그는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지독할 수 있는가? 목숨이, 젊음이, 앞날이 아깝지 않은가?

 

사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것이 콘노 코지의 진심일 것이라는 것이. 그는 진심으로 조선을 일본의 일부라 생각하고 있었다. 조선인마저도 일본의 지배를 받는 일본의 신민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인인 이강토(주원 분)를 오히려 다른 일본인 경찰들보다 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강토가 사토 히로시가 되었듯 조선인도 언젠가는 일본인이 될 수 있으리라.

 

하기는 바로 그래서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이 일본에 의한 대한제국의 강제병탄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강제병탄이 있기 전까지 대한제국을 지키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던 박영효와 같은 이들조차 강제병탄이 이루어지고 적극적인 친일로 돌아서고 있었다. 조선은 일본이 되어야 한다. 일본이 되어 일본의 발전된 모습을 본받아야 한다. 민족개조론으로 이어진다. 지난 15회에서 백작 이시용(안석환 분)이 조선인의 흰옷을 근절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역시 그와 같은 맥락이다. 조선과 조선의 것을 버리고 일본과 일본의 것을 받아들인다. 일본인을 버리고 일본인이 된다.

 

근대화란 당위였다. 서구화란 필연이었다. 그런데 조선은 그것을 이룰 여력이 없었다. 고종이 재위해 있던 조선조정에게는, 대한제국 정부에게는 그것을 이룰 의지도 능력도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과 병합해서라도 일본의 지배 아래에서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 일본과 하나가 되어 근대화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문명화된 세계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시 일본이 메이지유신 당시 느끼고 있던 어떤 공포와도 맞닿아 있다. 쿠로부네는 일본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서구문명의 힘 그 자체였다. 오랜세월 동아시아를 지배해왔던 청마저 유럽의 힘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미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유럽의 제국주의 침략 앞에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도 자칫 방심하면 그같은 비참한 처지로 전락할 지 모른다. 그같은 절박함이 일본으로 하여금 유럽과 미국을 제외하고는 거의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모델로써 성공을 거두게끔 동기를 부여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동아공영에 대한 구상은 나타나고 있었다. 일본 혼자서 열강들에 맞서 자신을 지키기에는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아시아가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래서 일본의 침략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까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역시 일본에 의지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 수 있다면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하게 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인구와 영토, 자원, 시장, 나아가 대륙으로부터의 침략을 막는 방벽이자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다. 일본이 구상한 일본제국의 미래에 있어 조선이란 필수불가결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이들 가운데에도 일본 본토에서 상당한 위치에 있던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반수가 넘는 이들이 이후 일본본국에서 총리를 역임하고 있었다.

 

조선을 가르쳐 일깨운다. 야만적인 조선을 가르쳐서 문명인으로 만든다. 비로소 일본과 하나로 만든다. 은혜를 베푼다. 이강토를 사토 히로시로 받아들였듯 문명화된 조선인을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받아들여 하나가 된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것이 지혜다. 현명한 것이다. 거스르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이강토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시용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필 노비출신인 담사리만이 의심없이 그 한 길로 매진하고 있다. 조단장마저 꺾였다. 받아들이라. 콘노 코지의 온건함은 자신감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정의롭기까지 하다. 무서울 정도다. 그래서 조선은 저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말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당시 모든 일본인의 생각이 그와 같지는 않았다. 백작 이시용의 아들로써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이해석(최대한 분)조차 고이소(윤진호 분)의 한 마디에 자신 앞에 놓인 현실을 깨닫게 된다. 조선총독부를 위해 기사를 쓰던 기자 박성모(방중현 분) 역시 그 순간 만큼은 참혹한 현실 앞에 고개를 떨구고 만다.

 

"네가 누구든 조센징 아냐? 끌려가기 전에 입닥쳐, 이 새꺄!"

 

어떻게 해도 이해석이나 박성모나 조선인에 불과하다. 아무리 하잘 것 없는 말단경찰이더라도 고이소는 일본인이다. 그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일본과 조선의 지식인이 꿈꾸는 하나된 조선과 일본이라는 이상과는 달리 어디까지나 일본인은 정복자였고 조선인은 일본인에 정복된 처지였다. 우열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같은 우월감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초대총독 데라우치에 의한 무단통치가 3.1만세운동을 불러왔듯, 1940년대 이후 전쟁수행을 위해 보다 가혹해진 수탈은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었다. 20년대 이후 일본에 동화되어가던 조선인들은 오히려 민족말살정책이 강화되던 이 무렵을 계기로 진심으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반감 속에 민족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있었다.

 

당장 이강토만 하더라도 기무라 슌지(박기웅 분)의 형 기무라 켄지에 의해 어머니가 죽으면서 일본인에 대한 반감을 일깨우지 않았던가? 아무리 스스로 일본이려 해도 그를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던 고이소와 기무라 타로(천호진 분)가 그를 조선인이게 했다. 형 이강산의 죽음은 단지 계기였다. 그는 조선인이며 일본인과 싸워야 할 운명에 있다. 기무라 슌지가 형 기무라 켄지의 죽음을 계기로 스스로 일본인으로 각성한 것과 같다. 민족이란 그렇게 많은 경우 증오에 의해 그 정체성을 확인한다. 원망이나 미움이 없다면 민족이라는 것도 필요없을 것이다.

 

다만 그렇더라도 그같은 자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가? 알지만 행동하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이미 알고 있고 그래서 아버지 이시용에게 묻기까지 하면서도 이해석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 조단장(손병호 분) 역시 끝내 기무라 슌지의 고문에 굴복하며 항일의 전선에서 이탈한다. 한 번 고문에 굴복해 동지를 배신한 이를 더 이상 계속 믿고 함께 갈 수는 없다. 차라리 죽기를 바라겠지만 그 죽음조차 건넬 수 없는 인정이 더욱 슬프게 만든다. 대부분은 그렇게 살아간다. 무력하게. 비겁하게. 비굴하게. 그 가운데 일부만이 용기를 내어 현실에 맞서려 한다. 교도소에서 간수까지 할 정도면 일본인들에 그 충성도를 인정받고 있을 것이지만 그런 간수들조차 담사리가 탈출하는 것을 은밀히 도우려 한다.

 

담사리가 의외로 너무나 쉽게 이강토의 진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였다. 어찌되었든간에 이강토 역시 자신과 같은 조선인이며 조선의 청년이다. 목단을 사랑한다 말한다. 목단을 살려야 한다며 눈물까지 흘린다. 조선의 청년이 조선의 처녀를 사랑한다. 조선의 처녀를 살리기 위해 자신 앞에 눈물까지 흘린다. 그것이 바로 조선이며 조선인일 것이다. 그는 지독스러울 정도로 조선과 조선인을 사랑하고 있다. 이강토마저 진심으로 증오하지 않는다. 차라리 가엾이 여기면 여겼지.

 

콘노 코지와 기무라 타로가 충돌하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콘노 코지와 키쇼카이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총독은 정치적이다. 총독의 사고는 키쇼카이와 같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콘노 코지와 같다. 조선인에게 인권따위 있느냐 말하지만 온건하고 합리적인 콘노 코지와 입장을 함께 한다. 매우 정교한 장치다. 일본 정부의 입장을 말해준다. 조선은 일본의 일부다. 장차 일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총독은 그같은 일본 정부의 입장을 대변한다. 상대적으로 비주류인 낭인 출신의 기무라 타로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패배자인 조선인따위 일본인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에 불과할 뿐이다. 근본은 같다. 콘노 코지에게도 무능한 이강토는 쓸모없는 존재일 뿐이다. 쓸모가 있을 때 조선인도 가치가 있다.

 

아무튼 콘노 코지와 같은 이들이 득세하지 못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불온한 폭도에 불과함에도 온건하며 신사적이다. 심지어 그 가족을 이용해 협박을 하다가도 스스로 자신을 해치려는 행동에는 분노하는 인정마저 보인다. 일본제국에 협력한다면 그는 바로 일본의 신민이다. 만일 그와 같은 이들이 구일본제국의 다수를 이루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심지어 조선을 독립시켜 자치권을 주자는 주장마저 정부에서 나오고 있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이 무척 다행스러운 이유다.

 

여러 군상들이 나온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고, 가족의 안녕을 위해 민족을 배신하고, 다만 아직까지 신념에 의해 불의를 쫓는 이들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무력하게 지켜만 보고, 혹은 폭력 앞에 굴복하고, 입으로는 떠들면서도 현실에 안주해 움직이지 않는 비겁함도 있다. 합리적인 지배와 무도한 폭력, 그리고 야만적인 군림까지. 목숨을 내걸고 나라를 지키려 하는 이와 그를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위해 막아서는 이들 또한 있다. 기무라 슌지와 이강토는, 그리고 목단은 그렇게 멀어져간다. 바로 그런 시대였다.

 

기무라 슌지와 이강토의 머리싸움은 사실 조금 유치했다. 어느 정도 기대하기는 했다. 목단을 구하려는데 각시탈이 아닌 이강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각시탈이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 결국 이강토는 이강토 자신의 모습으로 목단에 대한 마음을 밝힌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항거하던 항일영웅기가 이강토의 정체를 쫓는 기무라 슌지와의 관계에서 스릴러적 긴장을 고조시키더니 끝내 목단을 둘러싼 3각관계의 치정극으로 바뀌고 만다. 우정과 사랑, 그리고 조국과 아버지 사이에서 고민하는 과정은 매우 디테일하지만 지루하기도 하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식민지의 현실이 암울함과 더불어 카타르시스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목단을 사랑함에도 기무라 슌지는 각시탈을 잡기 위해 목단의 아버지 담사리를 공개처형하려 하고, 이강토는 그런 기무라 슌지의 의도를 피해 담사리를 미리 서대문으로 호송해서 중간에 구해내려 한다. 하필 장면도 좋다. 이강토가 총을 든 채 담사리를 잡고 있고 그 앞에 담사리의 동지들이 서 있다. 그때 기무라 슌지가 도착한다. 이번에도 이강토는 기무라 슌지를 속여넘길 수 있을까? 그럼에도 기무라 슌지는 여전히 목단을 사랑한다. 역설일 것이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직도 모른다. 일본인인 때문이다.

 

강철무지개라 불렀다. 허무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헛되지만 부서지지 않는다. 1930년대 구일본제국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사상누각이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절망과 맞서싸운다. 비극의 시대다. 곱씹는다. 젊은 그들의 어긋남이 슬프다.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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