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카라와 독도주의, 독도의 쇼비니즘을 우려하다.

까칠부 2012. 8. 25. 09:12

바로 어제 8월 24일 카라의 컴백무대가 있었다.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거의 1년만에 새로운 음반을 내고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카라의 신곡 '판도라'보다 카라의 '독도'에 대한 입장이 더 궁금한 모양이다. 쇼케이스에서 어느 기자가 질문한 것이 카라의 대답회피라는 제목으로 연길 지면에 오르내리고 있다.

 

궁금하다. 과연 당시 현장에서 카라가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정리해서 답을 했다면 그때는 어쩌려 했던 것일까? 현재 카라의 주활동무대가 일본인데 일본과의 민감한 현안에 대해 지나치게 솔직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낼 경우 자칫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누가 책임지는가? 카라 자신만이 아닌, 카라의 소속사와 그와 관련한 다수가 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당장 카라가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다고 독도를 일본에 내주는 것도 아닌데 카라와 그들의 주위에 그같은 위험을 감수하라는 것은 악의적이다.

 

더구나 만에 하나라도 여러가지 다른 이유들로 인해 카라가 그들이 원하는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면 그때는 어쩌려는가? 퇴출이라도 시킬까? 독도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한국에서의 연예인 활동에 대한 여부까지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가? 독도에 대해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면 한국에서 연예인으로 활동할 수 없다. 독도가 곧 자격이 된다. 배척이다. 배타다. 오로지 한 가지의 입장만을 강요하는 맹목이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다. 새음반을 소개하는 쇼케이스 자리였다.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무대를 모두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그런데 굳이 독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전혀 상관없는 자리에서 상관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것도 그냥 지나가는 질문이 아니라 MC선에서 질문을 정리했더니 그에 대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어떤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새음반과 관계되었다면 새음반을 내놓고 활동을 시작하려는 카라 자신들에 대한 것일 터다.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돌아온 카라의 자격을 검증한다. 카라는 그 검증에 임함으로써 한국에서의 활동에 대한 자격여부를 검증받는다.

 

물론 독도문제는 중요하다. 대한민국의 영토다. 영토 이전에 많은 어민들이 독도 근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국가적 차원에서는 영토의 문제이고, 인근의 어민들에게는 생존의 문제다. 국민들에게는 민족적 자존과 관계된 문제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국민들이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하여 공공연히 남들에 드러낼 이유는 없다. 단지 국민 다수의 지지가 있다면 정부는 그러한 지지에 힘입어 주권을 행사하여 영토를 지킬 수 있다. 그 밖의 모든 개인적인 발언이나 행동들은 개인적인 판단에 따른 선택일 뿐 그것이 의무가 될 수는 없다. 정치인도, 학자도, 언론인도 아닌 카라는 단지 개인에 불과하다.

 

그다지 쓰고 싶지는 않지만 독도주의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는 이유다. 독도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된다. 모든 자격의 전제가 된다. 독도에 대해 묻는다. 대답해야 한다.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그것이 국민 다수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일본에서는 이른바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독도는 한국땅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와, 극우를 제외하고는 양심에 따른 입장표명이 가능한 사회, 일본이 어째서 우리보다 선진국인가를 깨닫게 된다. 최소한 대한민국 사회는 아직까지 가수의 쇼케이스 자리에서까지 국가적, 혹은 민족적 이슈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검증이란 자격에 미치지 못할 경우 배척하겠다는 배타의 의지다. 독도가 자격을 정한다. 그것이 이번 카라와 독도와 관련한 논란의 정체다.

 

쇼비니즘이란 그런 것이다. 다른 말로 맹목주의다. 맹목이란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같지 않으면 무조건 다른 것이다. 상대의 입장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모두는 동일해야 하고, 모두는 또한 단일해야 한다. 하필 한국인들이 현실에서 가장 흔히 쓰는 말 가운데 하나가 단일민족이라는 것이다. 독도가 그 빌미가 된다. 그 기준이 된다. 그래서 묻는다. 그래서 대답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비난한다. 다행히 그런 이들이 전보다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는 점이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할 것이다. 오히려 그같은 무리한 질문을 하고 기사를 쓰는 기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독도도 중요하지만 카라 개인들의 일본에서의 활동 역시 자신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마 만일 진정 필요한 때가 온다면 역시 카라 또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 밝혀야 할 것이다. 독도를 두고 상황이 급박해졌을 때. 한 사람의 힘이라도 더욱 간절히 필요해졌을 때. 카라가 갖는 영향력이라도, 카라 개개인의 힘이라도 독도를 지키기 위해 필요하다. 물론 설사 그런 상황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카라의 입장표명을 강제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아니 카라에게 어떤 특정한 입장을 강요할 수 있는 명분도 되지 못한다. 단지 카라 개인이 그것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카라는 한국인이고 한국사회의 구성원이다. 단지 그 입장이 다르거나 아직 유보적일 뿐. 독도가 한국땅이라고 주장한다고 일본의 개인들이 일본인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쓸데없는 물음이었다. 오히려 한국사회의 경직성만 내보이고 말았다. 한국사회의 다수의 의견은 아니더라도 언론인이란 어떤 특정한 사회에 대한 대표성을 갖는다. 그것을 기사로 내보냈다. 마치 카라의 대답을 듣지 못한 것이 그들을 비난할 근거가 되는 것처럼. 공격의 빌미를 만든다. 한국인들이 독도를 자기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지 강요된 결과라고. 주입된 사실을 억압된 분위기 속에 되뇌이고 있을 뿐이라고. 독도영유권에 대한 주장 자체가 우스워지고 말았다. 쇼비니즘 자체가 우스꽝스럽고 공포스럽다. 안에서는 공포이고 밖에서 보면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많이 성숙했다. 의외로 기사의 파급력은 크지 않다. 그러나 여전히 그같은 기사에 휩쓸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독도란 그만큼 민감한 소재인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뿌리깊은 열패감과 위기의식은 영토에 대한 타인의 의도에 대해 그만큼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개인을 인식한다. 그렇더라도 국가적인 지향과 유리된 개인의 삶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입장표명을 거부할 수 있다. 그 권리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민주사회라 할 수 있다. 민주화된지도 벌써 30년이 넘어간다.

 

독도는 독도, 카라는 카라다. 모든 개인은 개인이다. 개인의 입장이 있다. 개인의 삶이 있다. 단지 선택한다. 그래서 개인이다. 국가는 공적으로 공식적인 역할을 한다. 개인은 사적으로 개인적인 역할을 한다. 국가의 역할이 공적인 의무에 따른다면 개인의 역할은 사적 선택을 따른다. 그것은 하물며 특정한 개인이 자의적으로 강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개인에게는 개인의 삶도 중요하다. 국가적 이슈에 매몰되지 않는 것도 개인의 권리다. 어느새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다. 독도보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이 그같은 모든 개인들이라는 것을.

 

박지윤 당시 MC의 판단은 매우 적확했다. 그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적당히 중간에서 자르는 것이 옳다. 부적절한 질문이었음에도 끝까지 고집하여 악의적으로 기사를 쓴 기자들의 모습에서 기자가 지식인을 뜻하던 시대가 저물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소양의 문제다. 양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처구니없는 헤프닝이었다. 코미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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