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드라마의 제왕 - 큰 기대와 이도저도 아닌 결말, 드라마의 제왕은 없다.

까칠부 2013. 1. 8. 08:46

기대가 컸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드라마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제작자의 입장에서 한국 드라마제작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유쾌한 웃음이 있는 즐거운 드라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가 모두 끝난 지금 유일하게 드는 생각은,

 

"도대체 앤서니(김명민 분)가 드라마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이유란 무엇인가?"

 

이고은(정려원 분)의 마지막 나레이션에서처럼 단지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씌인 그녀에게 '드라마의 제왕'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인 것인가? 처음부터 그런 의도였는지도 모르겠다. 최고의 자리에서 밀려난 드라마제작자 앤서니가 신인작가인 이고은의 마음속에서 '드라마의 제왕'으로 인정받기까지의 멜로가 이 드라마가 처음부터 목적한 바였을 것이다. 단지 드라마 제작의 현실이란 그를 위한 소재일 뿐 핵심은 앤서니와 이고은 사이의 멜로였다.

 

최악이었을 것이다. 의학드라마는 병원에서 사랑을 한다. 수사드라마는 경찰서에서 사랑을 한다. 기업드라마는 회사 안에서, 혹은 거래처와 사랑을 나눈다. 멜로과잉의 한국드라마에 대한 비아냥일 것이다. <드라마의 제왕>에서도 앤서니와 강현민(최시원 분)의 입을 빌어 그같은 현실에 대해 말하고 있기도 했었다. 한국에서 드라마와 배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멜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의학드라마에서 의사들은 의사로서 자기 할 일은 하면서 사랑을 한다. 경찰은 수사를 하고, 기자는 취재를 하고, 비즈니스맨들도 자기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랑도 함께 최선을 다한다. 사랑만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드라마의 제왕>에서 앤서니와 이고은이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처음에는 그나마 괜찮았다. 드라마 제작을 위해 투자를 받아내려 동분서주하고, 겨우 받아낸 투자금으로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려 하자 이번에는 방송국 편성을 따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방송국 관계자와 거대 메이저 제작사, 그리고 배우와 작가, 제작자를 중심으로 드라마 제작의 주체들이 다양한 현실적인 관계를 그려낸다. 그런 과정에서 제작자란 과연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단편적이나마 드러나게 된다. 드라마를 쓰는 것은 작가이고, 그것을 TV화면에 옮겨놓는 것은 감독이며, TV화면에서 실제 연기하는 것은 배우들이며, 그같은 방송을 시청자들에게 내보내는 것은 방송국이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의 뒤에는 제작자가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같은 제작자의 존재가 드라마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앤서니와 이고은이 사랑에 빠지면서부터였다. 앤서니가 이고은을 사랑하게 되면서 제작자와 작가 사이의 첨예한 긴장관계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배우와 작가 사이의 갈등 또한 제작자인 앤서니가 개입하며 흐지부지되어버리고 말았다. 감독인 구영목(정인기 분)은 굳이 앤서니와 맞서려 하지 않고, 방송국 드라마 국장인 남운형(권해효 분)는 오히려 앤서니보다 더 착하게 드라마를 보듬는다. 차라리 드라마 초반 제국의 대표 오진완(정만식 분)이 꾸민 음모로 인해 비리혐의로 구속된 부패한 드라마국장이었다면 더 재미있을 뻔했다. 드라마의 시청률을 위해 작가와 배우, 감독, 그리고 제작자를 모두 압박한다. 그같은 압박으로부터 제작자는 드라마를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없었다. 처음 이고은의 대본을 시청률을 위해 멜로위주로 바꾸려 했던 앤서니의 시도는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일방적인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드라마는 처음부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1위에 오르고 있었다. 어쩐지 트러블메이커로 보이던 강현민도 순한 양이 되어 시키는대로 연기에 임한다. 성민아(오지은 분)와의 자존심싸움도 구영목 감독의 한 마디에 바로 접고, 심지어 나중에는 연기에 대한 욕심마저 일깨우며 드라마의 완성을 최선을 다해 돕는다.

 

앤서니를 사이에 둔 성민아와 이고은의 신경전도 앤서니가 일찌감치 확고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면서 또한 별 의미없이 끝나버린다. 시청률도 잘나오고, 배우들도 문제없고, 방송국 관계자마저 착해서 굳이 드라마에 대해 간여하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드라마에 위협이 되던 제국도 어느 순간부터인가 잠잠하고, 잠시 이고은을 위기로 내몰던 표절논란도 바로 사그라들어 버린다. 드라마제작자로서 무언가를 해 보려 하도 너무 순탄하다 보니 사실상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지켜 볼 뿐.

 

그러니 사랑만 하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이다. 사랑을 하다 보니 모든 갈등의 중심에 있어야 할 제작자와 작가의 사이에 갈등요소가 사라져 버린다. 제작자가 작가를 싸고돌며 모든 갈등요소를 차단해 버리니 더 이상 드라마 제작을 가지고 만들 이야기가 말라버린다. 사랑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신인작가로서 처음으로 자신이 쓴 드라마를 방송으로 내보내는데 고민이나 갈등, 어려움 등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도 이고은은 전혀 아무런 어려움 없이, 고민이나 갈등도 없이 수월하게 잘도 대본을 써낸다. 이고은의 말처럼 천재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작가로서 겪어야 할 것들을 겪지 않으니 그녀 또한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강현민과 성민아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구축한 최고의 스타연기자로서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경쟁심리는 이내 두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 위한 매개로서 작용한다. 이고은의 대본에 대해서도 간여할 수 없다. 제작자인 앤서니와도 서로 부딪힐 일이 없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던가. 서로간의 기싸움도 구영목의 개입으로 끝나고 나면 - 아니 기싸움을 오래 하려 해도 기싸움만 하기에는 시청자 자신이 너무 빨리 질려버린다. 앤서니와 앤서니가 제작하는 극중 드라마 '경성의 아침'을 위협하던 제국과 대표 오진완조차 회장(박근형 분)이 전면에 등장하고 그것이 남운형에 의해 한 번에 해결되면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제국이라도 있었다면 조금은 긴장요소가 되지 않았을까?

 

경쟁드라마가 보이지 않는 부분은 어쩔 수 없는 제작여건의 한계였을 것이다. 성민아와 강현민 급의 스타배우가 필요하다. 앤서니와 맞설 수 있는 오진완과 다른 제작자도 필요하다. 이고은의 반대편이 그 드라마를 쓰는 작가가 있다. 드라마의 스케일이 너무 커진다. 처음부터 그것을 의도하고 만들었다면 제국과 오진완이 그 반대편을 맡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은 앤서니와 편성을 다투고, 결국 드라마 시청률 경쟁을 할 경쟁드라마와 그쪽 사람들이 비게 된다. 시청률에 일희일비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경쟁드라마가 없다는 것은 드라마의 폭을 좁히게 된다. 이것은 기획단계에서의 오류가 아니었을까 싶다. 편성을 따내기 위해 경쟁하기보다 시청율을 가지고 경쟁하는 쪽이 보다 치열한 현실을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은 그렇게 이것도 저것도 아닌 드라마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결국에는 앤서니의 눈까지 멀게 만들며 감정과잉의 신파로 빠져들게 된다. 거기에서 굳이 앤서니가 치료까지 포기해가며 드라마 테잎을 방송국에 가져가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던가. 차라리 성민아가 늦어서 촬영이 늦어지고 있다는 주동석 피디(서동원 분)의 전화에 대해 이렇게 앤서니답게 대답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너를 그렇게밖에 안 가르쳤어? 그 정도 일도 알아서 해결 못해? 너 뭐하는 놈이야?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직접 다 해야 해?"

 

사고가 나기 전에 어차피 주동석에게 맡길 테잎이었다면 처음부터 그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겨도 좋았을 것이다. 앤서니가 촬영현장에 남아있어봐야 결국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은 작가인 이고은과 감독인 구영목이었다. 앤서니는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앤서니가 한 일들이란 주동석 역시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최소한 전화로 지시할 수 있는 정도의 일들이었다. 비장하게 치료까지 포기하고 남아 테잎을 배달하다 사고를 당하고, 그렇게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멀쩡히 살아난다.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병원에서의 긴박한 장면이 조금은 뜬금없다.

 

앤서니와 이고은 사이의 멜로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다. 흔히 밀당이라 부른다. 로맨스란 서로 밀고 당기는 맛이 있어야 재미도 있는 것이다. 강현민과 성민아의 사이가 그렇다. 분명 서로 이어질 것을 알면서도 강현민의 엉뚱함과 성민아의 까칠함이 그같은 예감에 대해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과연 두 사람은 서로 사귀게 될까? 그러나 앤서니와 이고은 사이에는 그런 것조차 없다. 조금 서로 밀고 당기는가 싶더니 앤서니가 앞을 보지 못한다고 하자 이고은의 순애보적인 고백과 앤서니의 수용이 모든 긴장을 흐트러 버린다. 이들 사이에 앤서니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조차 비극이 아니다. 비극이 비극이 아닌데 긴장이 긴장일까? 그것 나름대로 앤서니와 이고은의 캐릭터를 드러내고는 있지만 드라마의 재미와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 앤서니와 같은 처지에 놓이는 오진완의 모습은 왜 집어넣은 것일까? 남운형과도 화해한 제국의 회장이다. 그런 제국의 회장이 앤서니 때와 똑같이 오진완을 쫓아내고 그의 비서를 대표로 세운다. 더구나 앤서니와 오진완은 마지막 순간 서로 화해하고 있었다. 앤서니의 적으로서 응보를 받아야 할 이유도, 그렇다고 후반 거의 보이지 않던 그의 몰락에 쾌감을 느끼거나 할 이유도 전혀 없다. 불필요한 장면이었다. 그냥 형식적인 것일 게다. 어느새 대본을 쓰다가 익숙한 형식을 의미없이 가져다 쓴다.

 

실망이 크다. 드라마 제작의 현실을 파헤쳐 보여주는 블랙코미디가 아니다. 그렇다고 제작자와 작가 사이의 애절한 사랑을 보여주는 멜로도 아니다. 로맨틱 코미디라기에는 드라마가 너무 무겁고 우울하다. 긴장도 없고, 갈등도 없고, 그런 만큼 성취 또한 없다. '경성의 아침'이 마침내 시청률 30%를 기록했다고 해서 시청자 입장에서 어떤 느낌이 있던가. 차라리 멜로를 하려면 멜로에 집중하는 편이 이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처음 의도한 것이 그것이었는데 멋대로 오해한 것이든, 아니면 드라마를 써나가는 과정에서 엉뚱한 함정에 빠진 것이든, 결국은 시청자의 기대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것이 드라마의 한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시청률이 어느 정도 나와준 것은 역시 한국드라마에는 멜로가 빠져서는 안된다는 증명일 것일테고.

 

아쉽다. 그리고 안타깝다. 최고의 드라마가 될 뻔했지만 최악조차 아니게 끝나고 말았다. 작가 개인의 역량의 한계이며, 어쩌면 드라마제작현실 자체의 한계일 것이다. '드라마의 제왕'은 없다. <드라마의 제왕>의 결론일 것이다. <드라마의 제왕>은 마음속에 있다. 드디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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