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우치 - 이어지는 좌절과 절망, 어느새 지쳐가다.

까칠부 2013. 1. 18. 08:42

모든 예술은 궁극적으로 쾌락을 추구하여 만들어진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대중예술은 대중의 보편적 쾌락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긍정적 감정만이 아닌 슬프고 화나고 밉고 두려운 부정적 감정까지도 결국은 쾌락의 형태로서 사용되고 소비되어지는 것이다. 그 모든 감정을 아우르는 것이 결국은 재미일 것이다. 작품을 대하는 것이 즐겁다.

 

대부분의 개인들에게 일상이란 고단함 그 자체일 것이다. 이제 갓 걸음마를 떼어놓기 시작한 아이들에게조차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다. 본능이 있기에 욕구가 있고, 욕구가 있기에 불만이 있으며, 불만이 있기에 분노하고 고민하고 갈등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나마 아이들은 울면서 떼라도 쓰지만 어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소하는가? 그래서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는 것이다. 도박도 하고 싸움도 한다. 그리고 때로 그같은 현실에서 풀지 못하는 것들을 가상의 공간에서 풀기도 한다. 드라마가 있기 전에도 거의 모든 인간사회에서는 그와 같은 인간본연의 감정과 욕구를 담은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쾌락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희극적인 웃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실의 모순을 비틀거나, 혹은 그럼에도 끝끝내 선하고 정의로운 주인공이 승리하는 희망을 보여주거나, 그러나 반대로 오히려 더 강한 슬픔과 분노, 공포 등의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도록 함으로써 마치 예방주사를 맞은 듯 감정을 정화하는 효과를 노리는 작품들도 존재한다. 혹은 비극이라고도 부르고, 혹은 스릴러나 공포물로 분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이들 또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어떤 현실로부터 벗어난 쾌락일 것이다.

 

물론 드라마 <전우치>에도 비극은 존재한다. 왕의 장인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다. 사위인 왕과 딸인 왕비가 그 죽음을 바로 앞에서 지켜보아야만 햇었다. 왕비가 폐서인되어 궁에서 내쫓겼다. 왕이 꾀하는 모든 일들은 좌의정 오용(김병세 분)과 그가 앞세운 마강림(이희준 분)에 의해 모조리 저지당하고 끝끝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처지에 놓이고 만다. 화가 난다. 분통이 터진다. 어쩌면 저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오용과 마강림은 승승장구하고 왕과 전우치는 갈수록 궁지에 몰린다. 그래서? 비극도 지나치게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지겨워진다.

 

공신들에 의해 장악된 조정을 일신하고자 개혁을 추진했던 왕의 장인인 부원군(정호빈 분)이 죽임을 당할 때는 그같은 충분한 고조된 분노와 슬픔, 안타까움, 공포와 같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살렸어야 했다. 반드시 살았어야 했다. 부원군을 살리기 위한 전우치의 노력이, 그리고 왕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마지막 순간 바로 앞에서 저지되었을 때 깊은 탄식과 함께 절망과 좌절로 이어진다. 마강림을 원망하고 오용을 저주한다. 모든 시청자의 부정적인 감정이 악역인 마강림과 오용 두 사람에게로 향한다.

 

그러나 그 뒤가 없었다. 왕비는 비록 폐서인되어 궁에서 쫓겨났지만 전우치에 의해 구함을 받아 목숨은 부지했다. 단지 목숨만 부지했다. 왕은 무언가 주도적으로 일을 꾸며보려 할 때마다 매번 오용과 마강림에 의해 저지당하며 이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하기만 한 처지로 전락해 버렸다. 차라리 한 번에 그렇게 비참한 처지로 내몰렸다면 그 또한 오용을 비롯한 악역들에 대한 감정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으련만, 그러나 물이 끓는 줄도 모르고 익어가는 미꾸라지마냥 긴 시간에 걸쳐 작은 기대들이 하나하나 좌절로 바뀌어가며 어느새 체념이라는 감정에 길들여지도록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도저히 이 상태로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전우치는 굳이 다른 도사들로부터 도력을 받아 마강림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갖추려 하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조차도 비루하고 처절하기만 해서 과연 전우치가 마강림에게 이길 수 있을지, 아니 설사 전우치가 마강림을 실력으로 누를 수 있게 되더라도 그것이 어떤 쾌감으로 다가올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라도 해서 마강림을 전우치가 눌러야 해답이 보이고, 그럼에도 그런 수단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전우치와 왕이 놓인 처지가 한심하기만 하다. 마지막 순간에까지 왕의 마지막 고민은 오용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고, 그나마 왕에게 남은 마지막 측근인 상선의 암살계획마저 사전에 저지되고 만다. 죽임을 당하려 한다. 지쳐간다. 결국 전우치와 왕이 승리하여 마강림과 오용이 몰락하는 해피엔드로 끝난다 할지라도 기대를 가지기보다는 차라리 더 이상의 괴로움을 피하고 싶어진다.

 

사실 이것도 기술이다. 비극을 심화시킨다. 마강림과 오용의 악을 강화시킨다. 그럼으로써 극적 긴장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내 긴장만 하게 해서는 시청자 자신이 쉽게 지쳐버릴 수 있다. 작은 성취감을 준다. 마지막 순간에 느끼게 될 쾌감을 미리 맛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다. 절망한 척 술과 여자에 빠져 사는 듯 보이던 왕이 사실은 강직하고 청렴한 사류들과 만나 그들과의 연대를 도모한다. 오용의 설득에 넘어간 듯 그의 손발이 되어 있는 듯 보이던 상선이 사실은 다른 계획을 꾸미고 있다. 마강림에게 일방적으로 패하고 손발이 묶여 버린 전우치가 상황을 역전시킬 비책을 연구하고 찾아낸다. 매번 마강림과 오용이 승리하여 전우치와 왕이 어려운 처지로 내몰리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래도 끝까지 인내하며 지켜볼 수 있는 기대와 희망을 갖도록 만든다.

 

거꾸로도 좋다. 오용의 패악은 갈수록 심해진다. 도력으로도 마강림을 당해내지 못하는데 마강림의 계략으로 인해 갈수록 전우치의 입지 또한 좁아진다. 마강림의 뒤에서 마숙(김갑수 분)는 어떤 음험한 모략을 꾸미고 있다. 좌절과 절망이 쌓여가는 가운데 그럼에도 한 번 쯤은 전우치와 왕이 마강림과 오용에게 한 방 먹이는 작은 즐거움을 누리도록 해준다. 계속해서 불리한 처지로 내몰리는 것은 왕과 전우치이겠지만 그래도 한 주 방영분 2회 가운데 통쾌하게 웃을 수 있는 장면을 하나쯤 넣어둔다. 역시 비극을 견뎌내는 힘이 되어준다.

 

그러나 없다. 비극은 비극으로 끝나고 고난은 끝없는 고난으로 이어질 뿐이다. 장인이 죽고, 왕비가 내쫓기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더 이상 전우치를 믿지 못하게 되어 버리고, 나름대로 공들여 꾸미던 계획은 예기치 않는 우연으로 인해 들통나 더욱 자신을 궁지로 내몬다. 상선마저 등을 돌리는가 싶더니, 그렇게 오명을 뒤집어써가며 준비한 상선의 계획은 미연에 탄로나 그를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만든다. 이제 남은 것은 전우치 하나, 전우치가 다른 도인들의 도력을 받아 끌어올린 더 강해진 힘 뿐이다. 도대체 언제나 되어야 마음껏 웃으며, 기대하며 드라마를 볼 수 있을까? 현실도 괴로운데 드라마는 더 괴롭다.

 

그래도 한 가지 미덕이 있다면 오용이 진짜 나쁜놈이라는 것일 게다. 마강림도 이제까지의 뜨뜻미지근한 모습에서 제대로 악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변신이 너무 극적이라 아직까지 어색한 부분도 남아 있다. 배후에 숨은 마숙의 음모는 또다른 반전을 예고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그 부분으로 인해 정작 갈등과 긴장은 전우치와 마강림이 아닌 오용과 마숙 사이에서 더 크게 만들어진다. 역시 반전의 계기가 되어줄까?

 

피곤하다. 지친다. 행복하고 싶다. 즐겁고 싶다. 아니면 아예 슬퍼하고 화내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싶다. 몸서리쳐지는 혐오감과 공포감에 자신을 맡겨보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도저도 아닌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은 비극은, 아니 절망과 좌절은, 그리고 체념은 어느새 보는 이를 지치게 만들어 버린다. 그나마 주 2회 방송이라 방송되지 않는 나머지 시간들이 그같은 감정들을 희석해 준다. 기약없이 현실보다 더 버거운 드라마를 견뎌내지 않으면 안된다.

 

원래는 코미디였을 것이다. 유쾌하게 웃으며 볼 수 있는 드라마를 목표했을 것이다. 봉구(성동일 분)의 코믹연기가 힘을 잃는다. 차태현이 연기하는 전우치 역시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철견도 명기도 더 이상 우습지 않다. 이혜령(백진희 분)는 이제는 아예 왜 나오는지 모르는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치이고 있다. 길을 잃었다. 어설프고 애매하다. 아쉬운 부분이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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