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외딴 산기슭에 홀로 떨어져 있던 시골집에서는 귀신이 살고 있었다. 달빛이 비추면 어디선가 하얀 귀신이 꿈틀거리며 일어났고, 바람이 불면 어둑한 숲속에서 귀신의 치마끄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자의 울음소리도 어디선가 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미지란 곧 공포다. 귀신이 무서운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고 들리지 않기 때문에 들린다. 보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보이고 들려서는 안되는 것들이 들린다. 차라리 바로 앞에 귀신이 있어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면 그렇게까지 무서울까? 도시에서도 불꺼진 어둑한 골목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불길한 것이 살고 있는 것 같아 길을 가다가도 어느새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도시는 어쩌면 어렸을 적 시골집 근처의 숲과 같을 것이다. 해까지 저물고 어스름 별빛에 빼곡한 나무숲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하면 그곳에는 필경 필자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깃들게 된다. 호기심에 자신을 내맡기기에는 눈도 귀도 닿지 않는 어둠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필자로서는 전혀 알 수 없다. 혹시라도 어떤 불길하고 위험한 것이 그곳에 있다면. 마찬가지로 도시 역시 너무나 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기에 필자의 눈과 귀로는 그것들을 모두 담아내기 버겁다. 필연적으로 필자가 알지 못하는 미지가 도시에는 존재한다.
어렸을 적 아이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은밀하게 전해지던 '7대 불가사의'가 바로 그러한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바로 어제까지 가족이 전부이던 아이들이 어느날 학교라는 낯선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바로 그제까지 동네 친구들이 세상의 전부이던 아이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먼 동네에서 온 아이들과도 어울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과 그리고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고 약한 자신. 그래서 괴담이 만들어진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느 곳에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어떤 불길하고 두려운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19세기 초반 쓰여진 호러와 SF의 영원한 고전 '프랑켄슈타인' 역시 그같은 배경을 두고 쓰여지고 있었다. 어느새 부르주아가 귀족을 대신하고 이성과 과학이 신의 자리마저 넘보고 있었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로 세계는 보다 넓어지고, 산업혁명의 여파로 도시는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거대해졌다.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은 임금노동자가 되었고 빈민이 되어 도시의 한귀퉁이에 지옥도를 연출하고 있었다. 인간이 새롭게 발견한 이성과 과학은 인간의 미래를 밝혀줄 듯 보였지만 그러나 한 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다. 이대로도 좋은가. 작가인 메리 셸리는 어느날 꿈속에서 본 괴물을 모티브로 이 소설을 썼다고 밝히고 있었다.
최초의 추리소설인 <모르그가의 살인>이 미국에서 출판된 것이 그로부터 얼마뒤인 1841년이었다. 계기는 19세기 어느 호텔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었다. 완벽하게 밀폐된 상태라 여겨졌던 호텔방에서 시체로 발견된 피해자는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실제 작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에드가 엘런 포는 사건의 해결에 직접 뛰어들기도 했었다. 사건을 결국 자살로 결론지어졌지만 그러나 작가 에드가 엘런 포우는 그 사건의 이면에 매우 지독한 지능적인 악의가 있을 것을 가정하고 다양한 상상을 펼쳐보이고 있었다. 이 사건 이외에도 에드가 엘런 포는 다양한 사건들에 마치 자신이 탐정이 된 것처럼 끼어드는 열정을 보인다. 에드가 엘런 포는 최초의 추리소설작가인 동시에 유명한 호러작가이기도 했었다.
도시의 어느 귀퉁이에는 -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세상의 어느 구석에서는 은밀한 악의가 존재해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매우 지능적이고 흉악하면서도 잔인한 악의에 의해 아무도 모르게 살인은 저질러지고 모든 것은 미궁으로 빠지고 만다. 추리소설의 특징이 그래서 범죄에 있어 트릭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일 것이다. 우발적이고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범죄가 아니다. 아니 시작은 그렇더라도 그것을 은폐하는 과정에는 치밀하고 이성적인 고도의 수단들이 동원되고는 한다. 범죄란 범죄를 일으키고, 혹은 그것을 은폐하고자 하는 고도의 의지의 산물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독자들에게 혐오감과 공포를 심어준다. 독자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바로 가까이에 그같은 악의가 존재하고 있다. 추리소설에서 묘사하는 범죄가 갈수록 잔인해지고 고도화되는 이유일 것이다. 범죄란 은밀하면서도 매우 특별한 것이기에 보통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해결된다.
추리물과 수사물이 구분되어지는 지점일 것이다. 추리물은 기본적으로 미지를 전제한다.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범죄의 수단이나 동기들을 추적한다. 반면 수사물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일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추리물은 대개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밀실에서 제한된 조건과 단서들을 바탕으로 탐정의 지적능력에 의지해 사건을 해결한다. 반면 수사물은 발로 뛴다. 발로 뛰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아직 알지 못하는 단서들을 모은다. 추리물의 결론이 독자를 놀라게 만들 탁월한 범죄의 기술과 수단들을 밝히는 것이라면, 수사물의 결론은 범죄와 우리의 일상을 이어주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고, 또한 어떻게 그들은 피해자가 되었는가. 이제 도시의 삶에 익숙해지면서 도시의 많은 알지 못했던 부분들이 이해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추리소설은 2차세계대전 이후 아가사 크리스티를 마지막으로 상당히 정체되어 있는 편이다. 마니아들을 위한 장르문학으로 고착되어 있는 경향이 강하다. 반면 수사물은 그 영역을 갈수록 넓혀가고 있다. 이제는 범죄와 마주하면 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수사를 한다. 증거를 모으고, 단서를 찾고, 사람들을 만나며 증언을 확보하고, 범죄를 밀실이 아닌 일상의 개방된 현재로 끌어온다. 이를테면 얼마전 시즌2를 종료한 <뱀파이어 검사>의 경우 뱀파이어 특유의 사이코메트리를 사용해 단서를 확보했음에도 결국 발로 뛰어 찾아낸 진실이 그것을 배반하고 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뱀파이어의 권능으로 읽어낸 단서는 밀실에 있다면 진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섥힌 현실에 존재한다. 인간의 세계는 더욱 확장되어 더 이상 밀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추리소설은 이제 스릴러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다.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근원의 공포가 존재한다. 미지가 존재하고 그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실재한다. 더 무섭게. 더 섬뜩하게. 반면 수사물은 더 넓은 세계를 지향한다. 더 다양하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일상들이 일상의 범죄들과 만난다. 범죄란 미지도 공포도 아닌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래서 수사물에서 범죄란 때로 두렵기보다 슬프기까지 하다.
다만 그럼에도 양자의 경계가 때로 모호해지고 하는 것은 결국 어떻게 해도 범죄란 공포이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단서를 취합하는 구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디선가 끔찍한 범죄가 일어난다면 없는 단서라도 찾아서 그 범인을 잡고 공포를 해소시켜야 한다. 단지 서로가 사는 세계가 다른 것이 다른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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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터 쓰고 싶었던 글이기는 한데 무언가 확실한 주제가 없으니 애매해져서. 블로그라면 상관없는데 기고로는 그렇다. 이제 <특수사건전담반TEN>도 다시 시작할 테고, <더 바이러스>도 꽤 재미있고, 그때 자료로나 써야겠다. 확실히 쓰고 싶다고 다 써지는 글은 아닌가 보다. 걍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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