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불후의 명곡2 - 2주년, 진정한 불후의 명곡을 위해...

까칠부 2013. 6. 9. 06:56

흔히 우리 가락을 일컬어 한의 소리라 말하고는 한다. 하지만 정확히 그것은 신명의 소리가 아니었을까. 힘들고 고단하지만, 그래서 괴롭고 슬프고 아프지만, 그럼에도 살아있기에 어떻게든 살아가게 된다. 기왕에 살 것이면 보다 즐겁게 기쁘게 살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수수깡집에 옷도 없어 홑이불에 머리만 내놓고 있어도 흥부의 자식들은 그리 개구지고 왁자했다.

 

진정한 불후의 명곡들이었을 것이다. 짧아도 백 수 십 년이다. 어쩌면 그 몇 배의 세월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에서 불려져 왔는지 모른다. 아무리 좋은 노래이고 대중들로부터 크게 사랑을 받았던 음악이라 할 지라도 10년의 세월을 잊히지 않고 불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불려지는 노래란 더 드물다. 하물며 수백년이다. 이 땅과 이 땅 위의 사람들의 역사와 함께 해 온 노래들인 것이다. 그야말로 <불후의 명곡2>의 2주년에 어울리는 주제였다고나 할까. <불후의 명곡2>이기에 가능하다.

 

전통과 현대가 만난다. 아니아니다. 언제나 그 노래들은 현대였다. 그것을 민요라 부르고 전통이라 이름하기까지 그 노래들은 항상 지금이고 우리들 자신이었다. 과거의 어느 특정한 순간에 고정된 화석이 아니었다. 심지어 처음 노래를 지어 부른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작은 어느 한 개인이었을 테지만 사람들에게 불려진 회수만큼 멜로디가 더해지고 가사가 붙여졌다. 정선아라리만 무려 1300편의 다른 가사가 존재한다. 함경도에서 불렸다는 신고산타령에는 근대문명의 이기인 '화물차'가 가사에 등장하고 있다.

 

그냥 지금도 불려진다. 지금에 맞게 지금의 사람들에 의해 지금 불려진다. 그것이 옳을 것이다. 서구의 음악과 춤사위가 그렇게 전통의 음악과 어우러진다. 새로운 문명과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시대에 전통의 가락은 새롭게 생명을 얻고 사람들에게 불려진다. 원래 그랬어야 했을 테지만 근대란 또한 전근대로부터의 단절이며 근대사회에 있어 전근대란 박제된 기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아마 이번 <불후의 명곡2> 2주년 특집에서도 그같은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을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딜레마다.

 

아무튼 이번주 '얼씨구나 우리가락 특집'에서 그 첫머리를 팝핀현준, 박애리 부부와 정동하가 장식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포미닛 멤버 전지윤이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고 계속 심장을 뛰게 하고 있었다. 솔직한 평가로 필자의 느낌에 팝핀현준, 박애리 부부보다 정동하의 무대가 훨씬 민요라고 하는 본질에 충실하지 않았나 싶었다. 원래 민요란 모두가 한 데 어우러져 부르는, 혹은 모두가 함께 부르며 한 데 어우러지는 그런 노래였을 것이다. 그래서 메기는 소리가 있고 받는 소리가 있다.

 

누군가 목청 좋은 한 사람이 나서서 소리를 메기면 나머지 사람들이 흥을 돋우며 소리를 받는다. 모두가 듣고 감동하라고 목소리를 뽐내며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각자의 이야기이고 모두의 이야기다. 그래서 호응하며 소리를 받는다. '쾌지나칭칭나네', '닐리리야', '아리랑'과 같은 후렴이 그것이다. 자연히 흥이 오르면 같이 심장이 뛰고 서럽고 고단할 때면 함께 우울하게 가라앉는다. 아직은 개인보다는 우리여야 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충분히 개인으로도 즐기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박애리나 팝핀현준의 특별함이 요구되기도 한다.

 

오히려 팝핀현준의 설명이 퍼포먼스의 의미를 제한하고 있는 듯했다. 차라리 우리 민족이 지나온 역사와도 닮아 있었을 것이다. 굴곡이 있지만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달려왔었다. 좌절도 하고 절망도 겪어왔지만 그럼에도 그때마다 꿋꿋이 일어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는 익명의 과거와 모두가 함께 아리랑을 외쳐부르는 단합된 현재, 그리고 역동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희망찬 미래까지. 아리랑이란 그런 노래였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이 아리랑을 외쳐부른 이유가 그것이었을 터다. 하기는 결국 만들기는 아티스트가 만들어도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대중의 몫일 터다.

 

정동하가 말한 '록'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록이란 원래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비주류의 문화였을 것이다. 엄격하고 정교한 고상한 주류의 문화와는 차별되는 거칠고 분방한 상스러운 비주류의 문화에서 록은 탄생했고 또한 영위되었다. 팸플릿을 옆에 끼고 가만히 앉아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집중하며 감상하는 문화가 아닌 함께 뛰며 소리지르는 공감의 문화였다. 아예 연주도 가사도 듣지 않고 그저 분위기에 취해서 마치 어딘가 사이비종교의 집회를 보는 듯 광란에 들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가수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면 관객은 그것을 가만히 앉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함께 뛰고 소리지르며 그 자체를 공유하며 즐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무대였을 테지만. '쾌지나칭칭나네'는 원래 꽹과리를 두드리는 소리였을 것이다.

 

아마 포미닛의 '닐리리야'는 지나칠 정도로 포미닛다웠다는 것이 한계로 작용했을 것이다. 전혀 민요같지 않다. '닐리리야'라고 하는 후렴구와 얼마간의 멜로디를 차용해서 비슷하게 부르고는 있지만 전혀 민요같지 않고 포미닛의 신곡처럼 들린다. 아무리 아이돌인 포미닛과 민요는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닌 것이다. 포미닛의 신곡처럼 들린다는 말이 곧 그녀들의 무대의 성격을 설명해주고 있었을 것이다. 신나고 발랄하고 재미있었지만 '우리가락'이라는 주제에서는 조금 비껴갔다. 아니 그것이 바로 포미닛이 이해한 '우리가락'이었을 테지만 아직 보편의 인식은 그와는 많이 달랐다. 그래도 포미닛다워서 훌륭했던 무대였다.

 

과연 문명진의 소울은 진짜였다. '군밤타령'을 그렇게 구성지게 불러제낄 수 있다니. 소울이 아니다. 구성짐이다. 한을 넘어선 신명. 하기는 원래 흑인음악이라는 것도 노예로 끌려와 인간이하의 삶을 강요당하던 당시 미국의 흑인노예들에게서 시작된 음악이었을 것이다. 삶의 고단함과 설움을 신에 대한 믿음으로 승화하여 자신들이 기억하고 있던 고향의 음악에 담아낸다. 소름이 돋으려 하고 있었다. 마치 사포로 살갗을 살짝 쓸어내리는 듯 까끌한 무언가가 심연의 어딘가를 훑으려 하고 있었다. 서러움도 아닌 마냥 기쁜 것도 아닌 묘한 경계의 감성. 차라리 힘들고 고되니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서럽고 아프니 노래로써 즐거우려 한다. 누구나 한 번 들으면 다시 듣게 되리라. 아예 안 들을 수는 있어도 한 번만 듣고 마는 경우는 없다. 새삼 느끼게 된다. 아마 '군밤타령'을 부르고 있던 누군가 역시 문명진처럼 그렇게 구성지게 신명나게 자기 멋대로 부르고 있지 않았을까. 항상 감탄한다.

 

임태경은 역시 뮤지컬 배우였다. 어째 민요 '새타령'을 부르는데 뮤지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해석이 독특하다. 새가 갖는 또다른 보편적 이미지, 꿈과 희망과 행복의 낙관적 이미지를 전통의 가락속에 담아낸다. 당연히 가사도 다르고 멜로디도 다르다. 장단도 다르다. 그러나 임태경의 노래이고 임태경이 부르는 노래이다. 임태경의 무대다. 전통의 신명과는 다른 스케일이 임태경의 '새타령'을 들려준다. 과연. 명불허전이란 이런 때 쓰는 말일 것이다. 그동안 임태경이 보이지 않아 서운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역시 바다였다. 원래의 힘을 뺀 애절한 느낌을 살려 부르다가 조금씩 감정을 고조시켜 마침내는 처절하게 터뜨리고 만다. 슬픔이 중첩된다. 서러움이 쌓여간다. 누르고 누르고 또 누르고, 그러는 사이 자신의 안에서 모든 것들이 쌓이고 또 쌓여간다. 그것들이 터지는 순간 짧은 희열과 그리고 허탈함. 자신의 이야기였을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였을까? 인생은 이리도 슬프다. 삶이란 이리도 서럽고 외롭다. 아파하기에도 사람은 지친다. 오백년의 깊은 한이 짧은 무대에서 쌓이고 그대로 폭발해 버린다. 어째서 하필 그의 앞순서가 임태경이었는지. 그녀 역시 자신의 무대에서 주인공이었다. 슬프면서도 강인한. 그리고 아름다운.

 

언젠가는 지금 불려지는 노래 가운데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전통음악이라 불리게 되는 음악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불리며 가사가 더해지고 멜로디가 더해지는. 언제부터인가 자신들의 삶에 밀착한 노래들이. 차라리 불후의 명곡이라는 말조차 사소하게 들릴까? 처음 노래를 지어 부른 이는 잊혀져도 노래는 남는다. 사람보다 노래가 더 길다. 아주 오래전 지금은 잊혀진 누군가의 시간에 띄워보낸 메시지가 아닐까.

 

의미있는 무대였다고 생각한다. 하나하나가 새롭고 신선하다. 놀랍고 감동적이다. 우리의 소리다. 그리고 지금의 소리다. 우리들 자신의 소리이기도 하다. 수백년의 시간이 이렇게 한 시간 남짓의 시간만에 좁혀지기도 한다. 더구나 흔히 알고 많이 따라부르는 노래들이라는 것이 더 가치있게 들리고 있었다. 즐거웠다. 제작진과 출연가수들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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