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굿닥터 - 의사에게 묻다, 대중을 위한 동화

까칠부 2013. 8. 13. 07:20

누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의사야말로 말도 안되는 3D직종일 것이라고. 더럽고, 위험하고, 힘들다. 특히 외과의사의 경우 환자의 피와 체액이 낭자한 수술실에서, 잠시의 아주 작은 실수로도 삶과 죽음이 결정되는 첨예한 긴장속에 몇 시간이나 수술을 집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물며 성인보다 모든 것이 한참 작고 여린 소아외과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더욱 엄격한 룰이 필요했을 것이다. 환자를 위하고 또한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 자신을 위한다. 환자와 환자의 가족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과 부담을 최소화하고, 의사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최대한 자유롭게 한다. 모든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 모두를 위한 최선을. 환자와 환자의 가족과 의사 자신과, 그리고 더불어 의사 자신이 몸담고 있는 병원에 대해서도. 고도로 전문화된 현대의학에서 환자를 살리는 것은 의사 개인이 아니라 병원이라고 하는 조직이고 기관이다. 첨단의료를 위한 대단위의 자본투자는 병원단위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드라마는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의사이지 않은가. 사람을 살리는 직업일 것이다. 환자와 환자의 가족은 오로지 의사만을 바라보고 그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 성공가능성이 20%라고 한다. 실패할 가능성이 80%나 된다는 뜻이다. 실패의 가능성을 보는가. 아니면 성공할 가능성을 보는가.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한다면 최대한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고민했을 것이다. 실패 이후의 일을 걱정했기에 실패의 가능성만을 생각하고 아예 수술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은가는 결국 현장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이 환자를 위한 최선인가. 무엇이 환자와 가족을 위한 가장 나은 선택인가. 완치가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다. 하지만 완치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비용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완치될 가능성도 희박한데 무리하게 치료를 고집하기보다 보다 가치있는 일에 자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의사와 병원의 입장에서도 자원과 인력이 한정되어 있다면 보다 가능성이 높은 곳에 투입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의사로서의 양심과 지식과 경험에 의거 모두를 위한 가장 나은 선택을 고민한다. 그것이 설사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더욱 묻게 되는 것일 게다. 의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사를 믿고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환자의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결국 환자이고 환자의 가족이 될 터다. 과연 옳은가. 과연 그것으로 좋은가. 그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이었는가. 드라마의 주제일 것이다. 우화다. 자폐증을 앓았던 박시온(주원 분)을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동물적일 정도로 가장 순수한 의사로서의 본능을 간직한 박시온을 통해 의사들에게 묻는다. 믿어도 좋은가. 믿고 의지해도 좋은가. 설사 그럴 수밖에 없는 타당한 이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환자인 자신들을 위해 모든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는 의사를 모두는 바라기 때문이다. 동화이며 신화다. 박시온은 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천진하다.

 

결국 수술을 하게 된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래도 수술만 한다면 희박하나마 살릴 가능성이 생겨난다. 실제 수술도 성공적이었다. 김도한(주상욱 분)에게는 충분히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그런데도 김도한은 결심을 하는 그 순간까지 아이의 수술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아이의 수술을 결심하게 된 계기라는 것도 레지던트 우일규(윤박 분)가 소아외과 과장 고충만(조희봉 분)의 지시로 의도적으로 건넨 한 마디 얄팍한 거짓말이었다. 김재준(정만식 분) 과장과 레지던트들이 김도한의 의사로서의 실력을 우습게 여기더라. 고작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결심했을 수술인데 어째서 김도한은 그토록 의사로서의 마음가짐까지 들먹여가며 박시온(주원 분)의 주장을 무시했던 것일까?

 

고도화된 구조 속에 어쩌면 의사 개인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사 개인의 의사로서의 양심과 사명감이 묻혀버리는 것은 아닌가. 김도한과 박시온이 있는 환자와의 최전선의 이면에 병원장 자리를 둘러싼 저열한 음모가 오가고 있었다. 병원장 자리를 차지하고자, 그리고 아마도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어떤 목적을 위해서, 강현태(곽도원 분) 등은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김도한을 궁지로 내몬다. 김도한으로 하여금 아이를 수술케 하고, 그것을 빌미삼아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병원장까지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 마침 아이는 중태에 빠지고 만다. 자신을 살려달라고.

 

김재준도 옳다. 병원도 조직인 이산 각자의 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을 함부로 침범해서는 혼란만 가져올 뿐이다. 그것은 환자나 환자의 가족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김재준이 다른 과에 도움을 요청한다. 담당의의 판단을 믿어야 한다. 의사의 전문성을 의사가 믿지 못한다면 누가 믿어준다는 말인가. 의사가 먼저 나서서 그 신뢰를 해친다면 누가 의사를 믿고 자신의 치료를 맡기겠는가. 설사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있다손치더라도 그렇다고 각자의 영역을 넘어 개입하는 것은 심각한 월권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의사란 사람을 살리는 사람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김재준도 옳지만 그러나 환자를 위한다는 점에서 김도한 - 아니 박시온도 틀리지 않았다.

 

김도한은 그런 박시온을 견디지 못해한다. 환자를 살리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의사는 누구나 똑같다. 환자를 살리고 싶어 의사가 되었다. 아니 의사가 된 이상 반드시 환자를 살리고야 말겠다는 본능적 욕구같은 것이 생겨난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것이 있다. 모두를 위한 암묵의 룰. 그것은 책임이다. 넘어서서는 안된다.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까지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그만큼 무거운 일이다. 무서운 일이다. 차라리 알라고 말한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들이 어떤 의미인가를. 어쩌면 김도한 자신도 거쳐온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렇기 부딪히고 깨지며 후회속에 어른이 되어간다.

 

어린아이다. 순수하다. 그래서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틀린 것이 아닌가. 그 답을 들려준다. 드라마가 묻고 드라마가 답한다. 박시온이 묻고 김도한이 답한다. 김도한이 병원장 최우석(천호진 분)에게 어째서 박시온이냐고 묻는다. 최우석이 대답한다.

 

"의사니까."

 

다만 최우석이 말한 '의사'라는 말에는 박시온이 기계적으로 읊어대는 '의사'라고 하는 단어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이 실린다. 의사로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실패를 경험해 왔을 것이다. 아이를 수술하던 도중 발생한 긴급상황 같은 것도 그는 수도 없이 그동안 겪어왔을 것이다. 의사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이나 자괴감 또한 이루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느껴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의사라 말한다. 환자를 살리겠다고. 환자의 삶을 돌려주겠노라고. 다른 의사들은 아닐까. 그만큼 거쳐온 수라장이 다르다. 어른이다. 박시온이 목표로 해야 하는 그가 의지해야 할 어른의 등인 것이다.

 

드라마의 마지막에 김도한은 미처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에 그만 항복선언을 하고 만다. 방법이 없다. 절규다. 비명이다. 그러나 더 큰 위기는 없을 것이다. 절망과 좌절이란 동화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작은 시련에는 작은 보상이, 큰 시련에는 큰 보상이, 언제나 웃을 수 있다. 언제나 행복에 대한 기대로 웃으며 드라마를 지켜볼 수 있다. 시련은 있어도 절망이나 좌절은 없다. 이겨나간다. 딱 그 만큼의 시련만이 주어진다. 빛으로 비유하자면 한없는 밝음으로 향하는 눅눅한 잿빛 노을이랄까?

 

아마 언젠가는 자신의 이야기들과도 만나게 될 것이다. 치유받는 것은 환자들만이 아니다. 환자를 위해서도 의사들 자신 역시 치유되어야 한다. 아직 박시온의 내면이 모두 드러나지 않았다. 김도한 또한 꽁꽁 싸매고 있는 자기만의 사연이 숨겨져 있다. 강현태에게도 비밀은 있다. 동화의 마지막은 항상 하나의 문장으로 끝난다. 그리고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차윤서(문채원 분)는 그다지 감추는 것이 없다. 오히려 그녀가 왕자님 같다. 개구리가 된 왕자님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는다. 그보다는 엄마였는지도 모르겠다. 차윤서는 건강하다.

 

아무튼 충격이었을 것이다. 자기 힘으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조그만 미숙아였다. 수술실로 옮기는 것조차 아이에게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그 작은 몸을 가르고 수술을 한다. 메스보다도 가늘어 보이는 몸을 가르고 아이의 병을 치료해낸다. 불가능이라는 말이 이처럼 실감나게 느껴지기도 처음이다. 오늘이 급하다. 다음회가 답답하다. 인간의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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