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일반

무한도전과 표절논란, 그 원인과 해법을 고민하다

까칠부 2013. 11. 4. 05:57

2년마다 찾아오는 '무한도전 가요제'가 올해도 수많은 화제를 남기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고, 모든 음원사이트에서 '무한도전 가요제' 출전곡들이 차트의 상위권을 휩쓸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랄까 좋은 소식들 가운데 안 좋은 소식 하나가 '무한도전 가요제'의 성공을 희석시키고 있다. 하필이면 표절논란이다.

 

사실 표절논란이 올해만 이것이 처음이 아니다. 바로 얼마전까지 아이유의 새음반이 표절논란에 휩싸이고 있었다. 그전에는 로이킴이 있었다. 아이유의 경우는 장르적 유사성, 혹은 음악적 클리셰로, 로이킴의 경우는 대중음악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캐논'의 코드진행을 똑같이 차용한 것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 거은 무엇 때문인가? 해마다 새로운 음반이 발매되면 통과의례처럼 비슷한 음악을 찾아나서고 표절논란이 불거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아예 그같은 논란 자체가 지겨울 정도다.

 

결국은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대중의 뿌리깊은 불신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표절논란이 있어왔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명확하게 결론지어진 것은 거의 없다. 거의 표절이 확실시되는 경우에조차 사실을 인정하거나, 사실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기란 매우 힘들었다. 표절논란이 있던 당시에는 침묵과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나중에서야 저작권자의 이름을 바꿔놓는 경우마저 드물지 않았다. 당시는 표절이 아니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저작권자가 바뀌어 있었다. 과연 대중의 입장에서 그같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 가운데는 정말 억울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장르적 유사성이라거나, 음악적 클리셰라거나, 혹은 샘플링이라거나, 우연의 일치라거나, 변명이 아니라 실제 그것이 사실인 경우도 상당할 것이다. 아니 거의 대부분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어지간히 염치가 없지 않고서는 음악인을 자처하면서 다른 사람의 작품을 훔쳐서 자기 이름으로 내놓는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알몸을 내놓는 것과도 같다. 벌거벗은 채 대중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수많은 대중 앞에 자기 이름이 걸린 작품을 평가받는 것이다. 평생 음악을 하겠다 마음먹었을 때 자신의 이름이 표절작가라 불리기를 바랐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열정과 순수가 남아있다면 음악인으로서 가장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같은 해명들이 대중들에 전혀 설득력있게 들리지 않는 것은 그동안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8마디가 같으면 표절이라 하니 7마디만 같고 한 마디는 다르다. 기존의 음악을 멜로디와 코드만 살짝 고쳐서 전혀 다른 느낌의 음악처럼 들리게 만들거나, 아니면 거꾸로 전혀 다른 멜로디와 코드를 사용해서 기존의 음악과 유사한 느낌을 주도록 하거나. 이와 관련해서 자주 언급되는 단어가 '레퍼런스'라는 것이다. 

 

기존의 음악을 참고해서 안전하게 히트할만한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기존의 음악이 갖는 구성이나, 느낌, 혹은 기술적 부분들을 참고해서 그와 '같은' 음악을 만든다. 참고는 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의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지는가 하면, 때로 너무 많이 참고한 나머지 차용수준에 머무는 경우도 있다. 아예 노골적으로 기존의 음악에 기대어 만드는 이같은 음악들이 과연 순수창작물로 분류할 수 있는가. 단지 기존의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그와 비슷한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었을 때 그렇다면 그것은 전혀 표절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즉 표절의 기준이라는 것이 유명무실하다. 법원에서 판결까지 나왔음에도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표절의 기준이 있으면 그 기준을 피하는 기술 역시 날이 갈수록 교묘해진다. 어디까지가 표절이라 하면 그것을 교묘하게 피해가는 새로운 방법이 만들어진다. 어디까지는 표절이고 어디까지는 표절이 아닌가. 그에 대한 기준을 정하는 것도 대중음악인이고 그같은 기준을 회피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대중음악인이다. 기술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면  표절에 있어 그 여부는 대중음악인 자신의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대중음악인 자신의 양심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이름있는 음악인들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해명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많은 경우 의혹이 잦아들기는 커녕 논란만 커지는 것은 그래서다. 대중음악인 자신이 신뢰받지 못한다. 대중음악인 자신이 신뢰받지 못하니 표절의혹은 사실이 되고, 대중음악인 자신이 신뢰받지 못하니 그에 대한 모든 해명들은 변명이거나 제식구감싸기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대중음악과 대중음악인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악순환이다. 과연 출구는 없을까?

 

그렇더라도 결국 방법은 하나인 것이다. 엄격한 규준이다. 대중음악인 자신이 음악인으로서의 양심을 걸고 엄격한 규준을 세우는 것이다. 영향을 받는 것은 좋다. 영감을 얻는 것도 좋다. 어쩔 수 없이 비슷해지는 것이야 달리 방법이 없다. 그렇더라도 선을 정한다. 범위를 정해서 이 이상 넘어가면 그것은 표절이다. 최소한 이같은 범위 안에서 창작을 하도록 음악인 자신들이 자발적인 규칙을 정한다. 표절의혹이 불거지더라도 할 말이 있다. 물론 이 경우도 역시 음악인 자신의 양심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표절을 회피하는 기술은 넘친다. 다만 대중이 의혹을 제기했을 때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표절이 아니다.

 

어떻게 해도 대중이란 대중음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고객이며 소비자라는 것이다. 소비자와 싸우는 생산자는 없다. 손님과 싸워서는 어떤 기업도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대중의 눈치를 봐야 하는 입장이다. 대중의 지적이 부당하다고 싸우려고만 들어서는 불신만 더 깊어질 뿐이다. 무엇이 대중으로 하여금 대중음악과 대중음악인 자신을 불신하도록 만드는가. 그 원인을 살펴야 한다. 개별적인 해명이 아닌 음악인 일반의 보편적인 합의와 동의에 의한 규준을 만들어 대중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한다. 음악인으로서의 양심마저 표준화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슬픈 일일 테지만, 더욱 엄격하고 치열한 비판과 자기반성은 대중음악 전반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높이는 역할을 해 줄 것이다. 음악인 자신도, 대중도 음악의 표절여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가지게 된다. 쉽지는 않다.

 

어쩌면 표절보다 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대중음악과 대중음악인을 믿지 않는다. 그들의 정당한 해명조차 외며나며 듣지 않으려 한다. 영향을 받았다. 영감을 받았다. 장르적 유사성이다. 음악적 클리셰다. 그 이전에 그같은 해명이 적합한가. 충분히 타당한 규준에 의해 판단되어지고 있는가. 올바른 결론인가. 전문가에게 묻고 그 답을 기다린다. 전문가 자체를 믿지 못한다. 대중에 의한 혼란은 계속 이어진다. 더욱 중심(규준)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음악인 자신 역시 자신의 창작에 대한 엄격한 규준을 갖는다. 단순한 참고인가, 영향인가, 영감인가, 그도 아니면 그저 손쉽게 자기를 속이려 하는 것인가. 대중이 믿게 하려면 먼저 음악인 자신부터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모호한 것이 불신의 원인이 된다.

 

아무튼 쉽게 결론내릴 수 없는 문제다. 음악인 자신들도 마찬가지일 터다. 방법은 많다. 그것이 표절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사실상 없다 할 것이다. 그런데도 표절여부를 대중이 의식한다면 그 기준을 제시해야 할 책임 역시 음악인들에 있을 것이다. 과연 표절이었는가. 그 이전에 그에 대한 답을 믿을 수 있는가. 의혹만이 남는다. 갈 길이 멀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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