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가난과 정의 - 그들이 가치에 투표하는 이유...

까칠부 2013. 12. 16. 00:56

이익에는 선악이 없다. 아니 이익 그 자체가 선이다. 일단 손에 돈이 쥐어지면 그 돈이 어디서 왔는가보다 먼저 얼마인가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다시 손에 돈이 쥐어지기를 바라며 기대라는 것을 가지게 된다. 돈이 많은 부자일수록 더 큰 이익을 기대하고 관심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손해 역시 그 자체로 악일 것이다. 그러나 돈과 마찬가지로 손해 또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악이다. 납득해야 한다. 이익과는 달리 기대를 가져서는 안된다. 이것으로 끝내야 한다. 완결되어야 한다. 이때 인지의 부조화도 나타난다. 그래도 손해는 아니지 않은가. 혹은 손해는 보았지만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가난할수록 자신의 가난이 정의롭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부당한 이유로 내가 가난하다면 그것처럼 또 서럽고 억울한 일도 없다.


어째서 자신의 이익에 더 민감해야 할 가난한 이들은 가치에 투표를 하고,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는 부유한 이들은 이익에 투표를 하는가? 자본주의 아래에서 가난이란 실패다. 그리고 패배다. 그런 자신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런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반면 부유한 이들은 이미 맛본 더 큰 승리와 성공을 꿈꾼다. 자신의 가난마저 정의롭기를 바란다. 자신의 실패와 패배마저 정의로운 것이기를 바란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거나 더 큰 이익이 손에 쥐어졌을 때 그것이 곧 정의일 수 있다. 


정치란 정의라는 말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이집트의 신정체제에서 파라오란 태양의 아들이었으며 파라오에 의해 정의되고 집행되는 모든 정책은 곧 신의 말씀과 같았다. 그래서 납득할 수 있었다. 현실의 모순에도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은 순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파라오가 더 이상 신의 아들이 아니게 된다면 자신들을 억누르고 있는 현실의 여러 모순들이란 그 근거를 잃어버리고 만다. 어째서 자신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차별받는가? 분노는 권력을 동요시키며 또한 기층의 개인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만다.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였다. 로마에게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다.


종교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지적은 이것을 가리킨다. 종교는 곧 가장 거대하고 가장 보편적인 정의일 것이다. 신의 권위를 빌어 인간세상에 불가침의 정의를 세운다. 신의 뜻이라 말한다. 신의 의지라 가르친다. 그리고 내세에 신의 정의가 실현될 것을 예언한다. 현실에 불만을 가질 일도 분노할 일도 사라진다. 그 자체가 불경이며 불의다. 순응은 의무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호하려는 의미마저 보인다. 정의로운 세상에서는 억울할 일도 분노할 일도 없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 분노한다. 자기와 전혀 관계없는 일에 안타까워하고 억울해 한다. 그것이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향한 것이면 좋으련만, 그러나 누구도 자기가 가난하거나 비천하다 여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더 가치있고 더 고귀한 더 의미있는 무언가를 추구한다. 세상의 정의다. 이 세상의 올바른 정의를 세우고자 한다. 그렇다면 납득할 수 있다.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무엇이 된다.


그것은 본능이기도 할 것이다. 절박함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익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것은 나름대로 특혜일 수 있다. 그래서 항상 역사를 변화시켜 온 주역은 중간계층이었다. 충분히 이익을 경험했고 그래서 더 큰 이익을 탐할 수 있었던. 그들이 핵심이 된다. 민중은 비루하다.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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