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 격변, 마침내 이인임의 몰락이 시작되다

임견미(정호근 분)와 염흥방(김민상 분) 일파에 대한 공격을 주도한 것은 다름아닌 고려의 국왕이던 우왕(박진우 분)이었다. 그 동기도 명확하다. 여전히 이인임(박영규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인임의 건강이 좋지 않으니 이인임 이후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임견미와 염흥방은 이인임과는 다르다. 만일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다. 우왕이 임견미를 꺼려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우왕이 처음으로 설치한 왕명출납기관인 내재추를 사유화한 점이나, 임견미의 장인 공영장이 죽었을 때 장례용구 일체를 관부에서 설치해 준 것, 무엇보다 우왕이 부르는데 병을 칭하며 몇 번이나 부르고서야 마지못해 겨우 나섰던 오만과 무례가 있을 것이다. 임견미의 탐학이 너무 심해 우왕이 아들 임치를 통해 경고한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임견미가 벼슬을 내놓고 잠시 물러났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복귀하여 시중의 자리에 오르고 있었다. 이미 추락할대로 추락한 고려왕의 권위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가 바로 임견미였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것만 놓고 판단하자면 임견미는 탐욕스럽기는 하지만 왕을 어려워할 줄 아는 보통은 되는 신하로 여겨진다. 이인임의 뒤를 이어 조정을 장악한 임견미에 대해 우왕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는 권위가 제대로 살아있는 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우왕이 멋대로 임견미와 염흥방을 불러 무리한 요구를 하고, 이인임을 통해 그같은 요구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임견미와 염흥방이 우왕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는 동기가 되어 줄 것이다. 우왕이 임견미와 염흥방을 탐탁치 않아 하며 최영을 찾아가는 장면은 그래서 얼핏 무리하게도 여겨진다. 물론 그런 구구한 내용들을 일일이 집어넣으려면 드라마가 길어지고 지루해진다. 나름의 드라마적 재미를 위한 가지치기였을 것이다. 시청자가 딴생각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이인임의 와병과 임견미에 대한 불신이 우왕을 불안케하고 믿을 수 있는 또다른 신하를 찾도록 만든다. 시도때도 들려오는 잔소리가 지겹기도 하지만 그러나 오로지 일편단심 왕인 자신만을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조반의 일로 우왕이 최영을 찾은 것은 사서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이를 계기로 우왕이 주도하여 염흥방을 순군에 가두고 최영과 이성계에게 명하여 임견미를 치도록 한다. 녹봉이 충분치 않자 재상들은 이미 충분히 부유하니 병졸들부터 녹봉을 지급하라 한 것은 누구의 생각이었을까? 아무튼 그같은 우왕의 행보가 이인임을 동요케 하고 마침내 임견미와 염흥방을 통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조반을 역모로 몬다.

하륜(이광기 분)의 캐릭터도 무척 입체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권신 이인임의 처조카로써 측근에 머물며 권세를 누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인임과 그 당여들을 위해 사대부로서 쌓은 학식과 지혜를 아낌없이 베푼다. 그러면서도 미묘하게 선을 지키며 사대부로서의 도의를 추구하려 한다. 정확히는 누구보다 민감하게 손익을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명분에 어긋나면 반드시 그를 트집잡는 무리들이 나타날 것이고, 그것은 다시 자칫 자신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조반을 역모로 모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수일 테지만, 그러나 자칫 그 의도가 틀어지게 된다면 치명적인 역공을 당할 수 있다. 처세가다. 역사에 기록된 그대로 그는 어떤 명분이나 인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처세의 달인이며 모략가로서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 하륜이 세운 계획에 의해 정도전(조재현 분)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인간이 정치라는 것을 하기 시작한 이래 가장 흔하게 자주 쓰이는 전가의 보도일 것이다.

"반역이다!"

비단 권력에 대한 반역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 그것은 이단이 되고, 배교자가 되며, 사문난적으로도 불리고, 마녀라 이름지어지기도 한다. 적과 결탁하여 자신들을 위태롭게 하는 간첩, 혹은 배신자라는 표현 역시 매우 흔하게 쓰인다. 더 무서운 것은 그에 대해 아주 작은 인정이나 관용을 내보이는 것조차 그들과 같은 편에 선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다. 누구도 그들을 위해 변명하거나 옹호하지 못하도록.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사실인가의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거추장스러운 대상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일차원적인 목표다. 아니 대부분 전혀 상관없는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아무나가 그 대상이기 쉽다. 그를 대신해 공포를 손에 넣는다. 그를 보호하고자 나선다면 그 또한 같은 무리일 것이다. 가족과 친구마저 그를 배신하도록 만든다. 주위의 모두가 그를 배신한 채 자신의 눈치만 보도록 만든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그리고 드러난 악을 배제하기 위해 결집하게 된다. 스스로 감시한다. 자신이 의도한대로 상황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고, 공포로 억압하고 통제하며, 궁극적으로 더 큰 권력과 영광을 손에 넣는다. 유혹이 생길 수밖에 없다.

조반이 역모를 일으키고 최영(서인석 분)이 배후에 있다면 최영의 당여들은 혹시라도 최영에게 연루될까 그것부터 걱정해야 한다. 최영을 옹호하는 것은 물론, 만에 하나라도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튀는 것을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최영의 처벌을 주장할 수밖에 없다.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이인임과 그 일파에 약세를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사실관계를 모르는 사람들은 역모의 죄를 처벌하기 위해 이인임의 일파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다. 그만한 힘이 있기에 이인임과 그의 당여들은 누구든 원하면 역모로 몰아 처벌할 수 있는 주도권을 쥐고 정국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염흥방이 조반의 땅을 빼앗고 최영이 이인임에게 속아 실각한 일따위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않게 된다. 특히 권력을 한 손에 쥐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국면전환용으로 역모를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역사상 많은 반역들이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혹은 무지에 의해, 혹은 방관에 의해, 혹은 적극적인 동조에 의해, 그렇게 무고한 희생자들이 권력의 의지에 의해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오명속에 죽어가야 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그나마 나중에라도 진실이 밝혀졌지만, 그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망각속에 묻혀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권력을 쥐고 역사의 중심에 섰던 가해자들이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다는 진정한 뜻일 것이다. 살아남은 자만이 역사에 의해 기억된다. 이인임과 임견미, 염흥방의 악행은 기억하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항상 뜻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다. 자칫 힘이 부족하거나 틈을 보이면 역공을 당하고 만다.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독재자라 할지라도 어딘가에는 그의 정적이, 경쟁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다못해 반역을 노리는 측근이나 부하 가운데 기회를 노리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먼저 그 의도를 읽고 막다른 궁지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정도전이 이인임의 계획을 눈치채고 조언해오자 이성계(유동근 분)는 바로 함주로 사람을 보내 가병들을 불러들인다. 최영을 살리기 위해 최영과 함께 먼저 이인임을 치겠다. 이인임으로서도 도저히 내키지 않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와는 상관없다.

그야말로 정치의 우화일 것이다.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인임은 역모를 조작하려 한다. 조반의 일로 궁지에 몰린 것을 역모를 조작하여 반전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 그것이 통한다. 이인임에게 그만한 힘이 있고, 역모란 그만큼 큰 죄이기에 처음에는 이인임이 의도한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듯하다. 자칫 자신마저 역모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 최영의 반격은 사족이다. 반역이란 것이 어떻게 권력에 의해 이용되는가. 어떻게 그토록 허술한 반역의 조작이 현실에서 먹히고 마는가. 아주 가까이에도 있었다. 뚜렷한 증거조차 없이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형장에 서게 하여 역사에 기록한 경우가. 잊혀지지 않고 있다.

이성계가 비로소 역사의 중심에 선다. 변방의 군벌에서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최영의 파트너로써 고려의 국정을 주도한 위치에 이르게 된다. 정도전과 남은의 이름이 이성계와 함께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순간이다. 이인임의 권세에도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지만 이미 늦었다. 탐욕으로 쌓은 권력은 결국 탐욕으로 무너지고 만다. 고려와 함께. 이인임 역시 고려를 지키고 싶었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성계가, 정도전이 지키고 싶었던 고려는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사라진 뒤였다.

한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부정이고 부패다. 죄는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죄를 처벌받지 않는다. 비판도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를 짓고도 오히려 당당하다. 이인임조차 그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이인임 일파를 극단으로 내몰고 있었다. 아픈 현실의 거울에 비추어 본다. 고려를 망친 것은 과연 무엇인가. 드라마가 무거워지는 이유다. 너무 당연하다. 우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