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을 문득 떠올렸다. 모두가 범인이었다. 그러나 모두 범인이 아니었다. 주인공 김수현(이보영 분)과 그녀의 딸 샛별(김유빈 분)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그러나 누구도 범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누구인가?
이번에는 김수현의 남편이며 샛별의 아버지인 한기훈(김태우 분)이 범인으로 의심되는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 주민아(김진희 분)를 미행하고 한기훈을 감시했다. 마침내 알아낸 불륜사실로 협박까지 하고 있었다. 차봉섭의 살해를 사주하고, 차봉섭을 살해한 한기태를 사고로 위장해 죽였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범인이 살고 있다고 여기고 찾아간 아파트에서 김수현이 납치된다. 빗속에 기동찬(조승우 분)은 범인이 던진 김수현의 핸드폰을 주워든다. 과연 한기훈은 무엇으로 범인에게 협박을 받고 있었던 것이며, 한기훈이 알고 있는 범인의 정체와 진실을 무엇인가.
역시나 시청자를 낚기 위한 의도된 떡밥이었다. 주민아에게 끌려가던 샛별이 주민아를 밀치고 차도로 뛰어든다. 한기훈과 주민아의 관계가 알려지며 뱃속의 아이를 두고 주민아가 한기훈에게 겪었던 수모와 고통들이 수면위로 떠오른다. 벌써 뱃속의 아이를 지운 뒤라면 주민아의 원망이 샛별에게로 돌려질 개연성은 충분할 것이다. 실제 그런 의도가 아주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주민아가 샛별을 구하려 몸을 던지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든다. 자신을 비난하는 김수현에게 내뱉던 가시돋힌 말들처럼 단지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 것 뿐이었다. 샛별을 구하느라 도리어 자신의 아이만 위험해졌다. 그녀는 아무말없이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진다.
비로소 범인의 실체가 드러난다. 한기훈이 범인에게 전화를 건다. 범인을 만난다. 범인이 김수현과 샛별의 호텔까지 찾아온다. 그 모습을 CCTV로 확인한다. 범인의 아파트까지 찾아간다. 김수현이 범인에게 사로잡혀 인질이 된다. 그러나 마음을 놓아서는 안된다. 차봉섭 때도 그랬고, 장문석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민아 역시 충분히 범인으로 의심할만한 여러 정황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차봉섭을 죽이고, 한기태를 역시 사고로 위장해 죽이고, 주민아와의 불륜으로 한기훈을 협박하며, 기동찬의 어머니 이순녀(정혜선 분)에게도 편지를 보냈다. 당사자가 맞다. 그러나 정작 과거 샛별을 납치하고 살해한 범인은 그가 아닌지도 모른다. 단지 한기훈을 둘러싼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진행되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추병우(신구 분)가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날 갑자기 알지도 못하는 기동찬을 찾아와 그에 빌붙고 있었다. 기동찬이 이제까지의 생황을 청산하고 사람답게 사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100억을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들이 아니다. 기동찬이 모르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추병우는 그와 중요하게 얽히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앞둔 추병우가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빚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추병우가 사형에 반대하여 대통령(강신일 분)은 사형을 집행하기 위해 그를 만나려 한다. 기동찬의 어머니 이순녀가 음식을 해와 맡기고 간 장면에서 이순녀 역시 추병우를 알지 못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연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고 그것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아이들은 참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통제가 되지 않는다. 자제라는 것이 아직 몸에 익지 않다. 사랑받으며 자랐다.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신이 받은 사랑처럼 세상을 보게 되었다. 처음 보는, 더구나 장애까지 가지고 있는 기영규(바로 분)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어울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갑작스레 자신의 집을 찾아온 기동찬에게도 전혀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다. 비극을 더욱 심화시키는 장치일 것이다. 이렇게 착하고 좋은 아이가. 이렇게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가. 추병우가 자리를 비우고 제니(한선화 분)가 술에 취해 있는 사이 이번에도 몰래 집을 빠져나와 영규를 만난다. 마침 비로 중단되었던 스네이크의 공연까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 시간 샛별이 아닌 엄마 김수현이 위험에 빠진다.
기동찬의 어머니 이순녀 역시 용의선상에 오르고 만다. 필자 역시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 무서운 것을 모르는 순진한 샛별이라지만 아무 경계심없이 따라나서려면 그만한 친분이 전제되어야 한다. 더구나 집안일을 보아주던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를 보고 달려가다 사라지고 있었다. 앞서도 말했듯 한기훈에 대한 협박이나 차봉섭의 살해는 그와 별개로 이루어진 사건들일 것이다. 한기훈이 기동호(정은표 분)를 기소한 검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그 혐의는 더욱 확실해지는 듯하다. 경찰인 현우진(정겨운 분)이 아들처럼 그녀를 찾아와 챙기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용의선상에서 멀어 보이던 이순녀가 용의선상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와서 반전을 노리기에는 누구나 충분히 의심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공포라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는 감정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가장 순수한 것이 바로 공포라는 감정이다. 어쩌면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 건물 위에서 뛰어내리도록 만든다. 결국은 죽는다. 죽을 지 모르는 상황보다 확실하게 죽게 되는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다.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도리어 엄마 김수현으로 하여금 딸 샛별을 방치하도록 만든다. 딸을 살려야 한다. 딸이 납치되어 죽임을 당했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그 무력감과 좌절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그 슬픔과 아픔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
차라리 딸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면. 일을 핑계로, 혹은 딸을 위한다는 이유로, 딸과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들을 대신 채우려 했다면. 누가 딸 샛별을 죽이려 하더라도 항상 딸의 곁을 지키고 있으면 누구도 딸을 함부로 어떻헤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두렵다. 미지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아무거라도 해야 한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딸의 세계와 만난다. 의외로 딸은 엄마인 자신도 모르는 많은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김수현이 알지 못하던 딸이 살아가던 세계가 용의라는 형태로 보다 구체화된다. 역설적이게도 엄마 김수현이 딸 샛별을 알아가고 만나는 과정일 것이다.
모두가 용의자다. 샛별의 친구 영규가 다니던 복지센터의 자원봉사자도, 샛별이 다니던 문구점 주인도, 샛별이 이모라 부르던 김수현의 후배 주민아도, 영규의 할머니 이순녀까지 모두 용의선상에 오른다. 한기훈이 어쩌면 범인을 알고 있다. 샛별이 죽임을 당했을 때도 어쩌면 한기훈은 범인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 누가 있을까? 현우진이 있을까? 추병우도 예외는 아니다. 모두가 범인이다. 그러나 누구도 범인이 아니다. 단 한 사람. 과정이 험난하기만 하다.
사소한 문제들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충분히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드라마는 흡인력을 보여주고 있다. 샛별을 연기하는 김유빈이 귀엽다. 추병우를 연기하는 신구의 연기는 능청스럽고 정감이 넘친다. 이순녀는 자식을 둔 어머니였다. 정혜선을 보면서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렸다. 순간순간 숨이 막히도록 긴장된 장면들이 보인다. 빗속의 장면은 의도된 연출일 것이다.
빠져든다. 누가 범인일까? 그러면서 매회 알지 못하던 일상의 부조리들과 마주하게 된다. 위험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다. 악이라 여겼던 것들이 너무나 가까이에 아무렇지 않게 도사리고 있었다. 평범하지 않은 아줌마가 일상을 깨뜨리며 싸운다. 아직은 미궁속이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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