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고 어둡다. 청말민국초를 살았던 중국인 저술가 리쭝우가 주장한 '후흑학'의 요체다. 면후심흑(面厚心黑), 얼굴은 두껍게, 마음은 더욱 시커멓게. 진심을 감추고 때로 거짓과 진실을 뒤바꾼다. 탐욕에 대한 집요함을 놓치지 않는다. 마침내 손에 쥐게 될 결과야 말로 그가 하는 모든 행동과 그를 위한 수단들의 이유가 되고 동기가 된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남이다. 아들 강동석(최다니엘 분)을 살리기 위해 장기를 이식할 수 있는 대상을 찾던 도중 우연히 알게 된 사이다. 김지혁(강지환 분)이라고 하는 개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지금도 역시 인간 김지혁에 대한 어떤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태연히 사람들 앞에서 그를 아들이라 소개하며 실제 아들처럼 대하고 있다. 진실을 알고 주위의 저지마저 뚫고 연설중이던 자신의 앞에 나타난 김지혁을 보고서도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없이 마치 미리 준비했다는 듯 그를 현성유통의 사장으로 임명하겠다는 발표를 한다. 앞서 검찰쪽 인사와 만나 건네받은 정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지혁은 솔직하다. 자신의 속내를 숨길 줄 모른다. 그래서 이 모양이다. 억울하면 억울하다. 화가 나면 화가 난다. 그리고 되갚아주고 싶어지면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 답답하기도 하다. 어쩌면 강성욱(엄효섭 분)의 친아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주저없이 도상호(한상진 분)를 찾아가 폭력까지 휘두른다. 그렇게 강성욱이 있는 곳을 묻고는 화려한 자동차 액션까지 선보이며 어김없이 그곳으로 달려가기까지 한다. 그렇게 강성욱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면 그때는 무엇을 어쩌려는 속셈이었을까. 그동안 누렸던 좋은 집과 멋진 차와 많은 돈들이 그대로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하지만 감춰야 할 것도 없었고 지켜야 할 것도 없었다. 지금도 김지혁의 본질은 고아이던 어린시절과 다르지 않다.
이성적이라는 것은 계산할 줄 안다는 것이다. 가치를 계량하고 우선순위를 나눈다. 철저히 자기의 이익만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것을 위한 기술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보다 성공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나아가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승자가 될 수 있겠는가. 성공에 익숙하다. 성공하는 방법을 안다. 자신을 속이고 자신을 죽인다. 철저히 자신을 억누름으로써 기회를 손에 넣는다. 필요하다면 없는 아들도 만든다. 필요하다면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아들로 여기고 사랑할 수 있다.
김지혁이 만일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다면. 계산할 줄 알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었더라면. 사실이 아니더라도 대기업 회장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라 자기 앞에 나서고 있었다. 지나치게 속물인 것일까. 김지혁은 그래서 아직 성공에 익숙하지 않다. 지나칠 정도로 솔직하게 김지혁의 행운에 자신이 먼저 들떠 있는 양대섭(장태성 분) 또한 순수하게 자기의 욕망에 충실하려 한다. 욕심을 부리는데 전혀 어둡거나 음습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뒤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멀리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지금을 살아간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세계가 만난다. 속고 속이는 세계다.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세계이기도 하다.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심은 가식이 된다. 그래도 한 가지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가식과 기만이 그저 오늘을 살아가던 김지혁을 그들의 세계로 옮겨놓는다. 그저 진심과 진실만이 존재했다. 그렇게 여겨왔다. 순수했기에 거칠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이었다. 너무 일찍 사실이 밝혀진 것은 의외였다. 그조차 장차 충돌하게 될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를 묘사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거짓과 기만에 분노하는 김지혁과 그조차도 철저하게 이용하기 위해 연기하는 강성욱을 통해. 너무 쉬운 결론은 그래서 벌써부터 식상하다. 뻔한 교훈은 이제는 너무 지겹지 않은가.
김지혁에게 소미라(이다희 분)는 동경의 대상이다. 차라리 강성욱보다 소미라가 더 가깝다. 세련되고 지적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차라리 아버지라 주장하는 현성그룹의 총수 강성욱을 멀리할지언정 자신과 같은 허름한 술집에서 소주를 마시는 그녀를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말 그대로 강성욱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소미라는 그나마 김지혁이 인식할 수 있는 그의 세계와 가까운 존재다. 그리고 소미라에게 김지혁은 어쩌면 그녀가 어딘가에 놓아두고 온 그리움의 대상일 것이다.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왔다. 겨우 손에 닿을 수 있는 곳까지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진심이며 진실이었는가.
김지혁의 진실을 알고 있다. 강성욱과 최윤정(차화연 분) 부부의 진심 또한 알고 있다. 그에 공감하기도 했다. 차동석을 위해 김지혁을 죽이고 싶어했었다. 한편으로 그런 김지혁에게 연민도 느낀다. 이미 자신은 현성그룹 일가를 위한 도구다. 그들의 사소한 취향 하나에까지 목매어가며 그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아낌없이 바쳐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어딘가에 놓아두고 온 것처럼 무기질적인 충성심을 내보이는 도상호는 그녀를 억압하는 현재이며 미래다. 김지혁은 그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강동석의 마음을 얻어낸 지금 이 순간에조차 그녀는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한다. 김지혁이 곧 지금의 자신이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적인 대화일 것이다. 어떻게 알지도 못하는 김지혁을 아들로 맞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자신이 낳은 아들로. 그렇다고 아들을 살리겠다고 다른 사람의 장기를 빼내려 아들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당연한 감정이고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무 감정없이 단지 필요만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를 따르고 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한 편으로 중국을 통해 또다른 희생자를 구하고 있었다. 진실을 알고 따지려 찾아오는 김지혁을 순간의 임기응변으로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 한다. 차라리 어떤 잘못도 느끼지 못하는 냉혹함이 아니기에 더 섬뜩하다고나 할까.
결국 우연에 다시 다른 여러 조건들이 더해지며 기적은 김지혁에게 현실로 다가온다. 어떻게 출생에 대해서는 얼버무려지고 현성그룹 총수의 아들로서 현성유통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현재만이 남게 된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경험도 경력도 없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외계인이다. 바다를 표류해 떠내려온 이방인이다. 그의 좌충우돌은 전혀 생경한 법칙과 질서 속에서 어떤 그림들을 그려낼까. 강성욱의 의도는 단순하다. 검찰총장이 될 것이 확실한 과거의 악연을 위해서 잘라낼 자신의 손발이 필요했다. 그의 가장 가까이에 소미라가 있다.
어느 정도 그려지는 그림이 있다. 그래도 이렇게 일찍 김지환의 출생의 비밀을 드러낸 파격은 기대를 더하는 요소가 된다. 너무 일찍 강성욱과 도상호의 계획이 밝혀졌고, 그것이 다시 반전처럼 강성욱의 목적을 위해 이용된다. 드라마를 위한 전개로 이어진다. 현성유통의 사장과 비서 소미라. 현성유통은 강동석이 사장으로 있던 회사였다. 다시 말하지만 김지환은 외계인이다. 표류해 온 다른 세계의 이방인이다. 혼란과 헤프닝인 드라마의 재미다. 추격해오는 차들을 따돌리듯 김지혁은 그렇게 자신을 에워싼 그들과 맞서싸워야 한다.
힘들게 저지를 뚫고 도착한 그곳에서 김지혁이 마주한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진실보다 더 교묘한 거짓이었다. 그를 위한 무대였다. 무대를 만들 계기였다. 소미라와 함께한다. 다른 세계와 만난다. 당연하게 속이고 이용한다. 그것을 거부하며 분노한다. 보잘것없는 하류인생이 재벌의 2세가 되어 사장자리에까지 오른다. 기적이며 부조리다. 흥미롭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812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과천선 - 의뢰인의 죽음, 지키지 못하다! (0) | 2014.05.02 |
---|---|
개과천선 - 김명민의 새법정드라마, 순조로운 출발 (0) | 2014.05.01 |
빅맨 - 잔혹한 현실의 아이러니가 주는 꿈과 환상 (0) | 2014.04.29 |
정도전 - 개혁 아닌 개혁, 저항에 부딪히다 (0) | 2014.04.28 |
정도전 - 고려의 저항, 개혁이 혁명보다 어려운 이유 (0) | 2014.04.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