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의 장치를 사용한다. 김석주(김명민 분)의 기억상실과 김석주의 아버지 김신일(최일화 분)의 알츠하이머, 그리고 기업전문 변호사로서 김석주가 해온 일들과 신출내기 이지윤(박민영 분)의 실수가 겹쳐진다. 같은 시간 불량계열사 기업어음(CP) 발행의 혐의를 지고 김석주의 약혼녀 유정선(채정안 분)이 검찰에 출두하고 있었다. 유림그룹을 살리기 위한 희생양으로써.
결국 시나리오일 것이다. 단서와 단서를 잇는 선이다. 선과 선을 잇는 면이다. 면과 면을 이어 만드는 입체다. 단서란 항상 한정되어 있다. 모든 사실을 제 3자가 알기는 힘들다. 법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주어진 단서들을 취합하여 최대한 진실에 다가가려 노력할 뿐이다. 발달한 지성은 그 과정까지 왜곡하고 얼마든지 오염시킬 수 있다. 이지윤이 자기만의 정의감으로 써내려간 시나리오가 변호사로서의 지식과 경험, 재판의 기술등이 더해지며 결국 법정에서 사실로 인정되고 말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까지 살해했을지도 모르는 흉악한 살인범이 자신의 실력과 노력에 의해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할 수는 없지만 믿을 수는 있다. 항상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이었다. 변호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혹이 생겼을 때 의뢰를 회피하는 것 뿐이다. 만일 의뢰를 받았다면 의뢰인이 요구하는 바 기대에 충실해야 할 의무가 있다. 불법을 저지르고도 법의 처벌을 면하고자 한다. 불법과 탈법을 동원해서라도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고 더 큰 이익을 얻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요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돕는다. 그 과정에서도 역시 김석주는 시나리오를 썼을 터였다.
유림의 권재윤(정한용 분) 회장이 달라진 김석주의 태도에 낯설어하고 당황하는 것이 바로 그래서였을 것이다. 원래의 김석주라면 그 순간 시나리오를 써주었을 것이다. 의뢰인인 자신을 위해서. 유림그룹과 오너일가를 위해서. 누가 잘하고 못하고는 상관없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도 전혀 아랑곳없다. 어차피 박상태(오정세 분)의 말처럼 김석주는 다른 사람의 평가따위 신경쓰는 타입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꼼꼼하다. 작가의 완벽주의적인 면모를 보는 듯하다. 사소한 장면에서도 놓치지 않고 김석주라는 캐릭터를 설명하려 노력한다. 필요하다면 그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가장 효과적인 시나리오를 써서 그것을 사실로 만든다. 그로 인해 설사 부모를 살해한 패륜아가 무죄로 풀려나더라도 그것이 곧 변호사인 자신의 일이다.
김석주가 최고인 이유였다. 의뢰인이 원하는 최고의 시나리오를 쓰고, 그 시나리오를 다시 현실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이 김석주가 기억을 잃고 얼마나 크게 많이 달라졌는가를 알 수 있는 기준이 되어준다. 억지로 시나리오를 쓰지 않는다. 의뢰가 들어왔음에도 괜한 정의감이나 승부욕으로 그것을 맡기보다 의혹을 인지하는 순간 냉정하게 외면해 버린다. 과거의 냉정함과는 다른 냉정함이다. 마찬가지로 유림그룩에 대해서도 불량계열사 CP발행에 대한 대책에 있어서는 최선의 방법을 제시해 주지만, 그렇다고 사실을 왜곡하고나 진실을 기만하는 유림그룹이 원하는 김석주만의 시나리오는 쓰고 있지 않았다. 다정해졌는데 더 냉정해졌다. 어쩌면 자신의 양심에 더 엄격해졌다.
변호사인 자신에 도취되었다. 변호사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에 스스로 고무되어 버리고 말았다. 워낙 대단한 변호사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던 사건을 뒤집어 진실을 파헤치고 의뢰인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유정선의 존재로 말미암아 더욱 김석주를 의식하게 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김석주가 그랬던 것처럼 법의 힘으로 혹시 모를 억울함으로부터 누군가를 간절히 구해주고 싶었다. 바람이 대상을 찾는다. 보지 못한 것이라 보지 않은 것이었다. 자신의 바람을 대상에 투사한 것이었다. 처음부터 의뢰인은 변호사의 도움이 필요한 억울한 희생자여야 했다.
이지윤의 섣부른 이기다. 그리고 그것이 기억을 잃기 전 김석주가 최고라고 불리울 수 있었던 이유다. 지금의 김석주가 가장 경멸하고 혐오하는 것이다. 이지윤의 실수는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고, 그런 이지윤을 향한 김석주의 핀잔과 조언은 기억을 잃기 전 김석주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보다 엄격하게 보다 냉정하게 사실만을 본다. 그 사실에만 충실하려 한다. 약혼녀의 회사이기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유림에 대해 기억을 잃은 지금 냉정하기만 하다. 그런데도 정작 유정선 자신에게는 다정하다.
역설일 것이다. 기억을 잃고 더 자상해졌다. 더 다정해졌다. 더 진실해졌다. 비로소 약혼한 사이라는 실감을 가질 수 있었다. 거래였다. 비즈니스였다. 알면서도 어쩌면 유정선은 김석주에게서 다른 무언가를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자신의 반지에 대해 새삼 시나리오를 쓰게 된 이유였다. 무언가 에피소드를 만들고 싶었다. 특별한 이야기를 가지고 싶었다. 기대했던 것처럼 유림그룹을 위해서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김석주와의 관계는 더 충실해지는 것 같다. 신기루다. 그러나 결국 자신과 약혼한 김석주는 눈앞의 김석주가 아니다. 그는 단지 다른 김석주를 위해 자신과 약혼한 사이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유정선이 김석주와 약혼한 것은 김석주 자신이 외할아버지인 권재윤에게 쓸모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림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유정선의 가치이기도 했다. 유정선의 쓸모였다. 그런데 김석주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관계한 부분 이외에 대해서는 관계하지 않겠다 선을 긋고 있었다. 김석주가 쓸모가 없다. 마찬가지로 김석주와 결혼할 유정선 역시 쓸모가 없어졌다. 아들들은 회사를 물려받아야 한다. 희생양으로 너무나 당연할 것이다. 그래도 오너 일가의 혈족이 희생양으로 나서야 어느 정도 대중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개인들이 등장한다. 증권사에서 추천하니 불량계열사의 기업어음인지도 모르고 덜컥 구입한다. 이율이 높다는 말에 가진 돈 다 털어 몽땅 사버린다. 흑자기업이라고 마음놓고 노조위원장을 맡기도 한다. 회사에는 전혀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서가 아닌, 타의에 의해 휘둘리고 마는 무력한 현실일 것이다. 바로 가까이에 존재한다. 설마 차영우 로펌에서 심각하게 논의되던 유림그룹의 위기가 이지윤의 일상마저 뒤흔들줄이야. 한 주를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저 축구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기존의 자기를 지우고 새로운 자신으로 리셋되었다. 조금씩 기억을 잃으며 자신마저 지워간다. 아버지와 아들의 운명이 겹쳐진다. 완전히 잊게 된다. 누구도 아니게 된다. 그때 아버지 김신일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를 통해 김석주가 보게 되는 것은 또한 무엇일까? 기억을 되돌린다. 원래의 자신을 되찾는다. 그러나 그 자신 또한 원래의 자신이 아닐 것이다. 기억을 잃고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아버지와 그의 사이를 증명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고차원적인 물음일 수 있다. 혹은 그저 흔한 드라마적인 장치일수도 있다.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법의 역할에 대해 변호사의 입장에서 철저히 비판한다. 전혀 다른 시각이다. 법이 기만당하고 농락당하는 과정과 그로 인해 희생되는 힘없는 개인들을 보여준다. 법이 정의롭지 않음을. 그럼에도 법이 정의로움을 입증하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뛰어다니고 있음을. 그 모순의 근본에 대해서도.
죄가 있는 의뢰인을 무죄로 만든다. 그를 위해 최선의 시나리오를 쓴다. 시나리오를 현실화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사실은 기술이다. 진실은 실력이다. 변호사로서 자신이 가져야 할 각오와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를 깨닫는다. 이렇게 무섭다. 변호사라는 것은. 이지윤도 성장한다. 정의는 가슴이 아닌 머리에 있다. 냉철한 이성에 있다. 그것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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