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정도전 - 권력 앞에서, 이방원과 신덕왕후 분열하다!

까칠부 2014. 6. 1. 06:17

[스타데일리뉴스=김윤석 기자]권력의지란 다른 것이 아니다. 권력을 위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무엇까지 댓가로 내놓을 수 있는가. 자기 자신마저 권력을 위한 제단에 제물로 바친다. 양심도, 인정도, 존엄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오로지 권력만이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이다.


다 가지려 한다. 무엇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과연 왕이다. 세상의 비난이나 손가락질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역사의 평가로부터도 자유롭고 싶다. 오로지 진정한 왕으로써 모두의 추앙과 존경을 받고 싶다. 역사에 순결하고 위대한 이름으로만 기록되고 싶다. 자연스럽게 정도전(조재현 분)의 대답을 이끌어낸다. 차라리 자신이 모든 오명을 듣겠다.


오명은 신하인 정도전이 듣는 것으로 족하다. 모든 죄과와 악업은 자신을 왕으로 받들어 모시는 신하들이 알아서 나눠지면 그만일 것이다. 왕으로서 군림하려 한다. 모두의 위에서 굽어보려 한다. 머리가 깨끗하려면 손발이 더러워야 한다. 이미 오물을 있는대로 뒤집어 쓴, 더럽혀질대로 더럽혀진 왕좌였다. 그러니 피로 더러워진 왕좌에는 앉지 않겠다. 그러니까 정도전 네가 알아서 그것들을 치우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입마저 더러워질 수 있다. 그것을 받을어 알아 모시는 것이 곧 신하라는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이성계(유동근 분)가 가진 권력의지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굳이 권력을 가지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런 권력따위 가지지 않아도 좋다. 만일 정도전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일단 권력부터 가지고 보는 것이다. 어떤 권력이 되었든 먼저 손에 넣고서 그 다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후회를 해도 그 다음에 한다. 권력을 손에서 놓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권력을 가진 자들만의 특권이다. 왕이 되고 나서도 왕이 되기 이전의 삶을 쉽게 놓아버리지 못하는 모습이야 말로 이성계라고 하는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권력을 위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방원(안재모 분)은 다르다. 하기는 신덕왕후 강씨(이일화 분) 역시 이방원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없던 권력의지마저 생겨버렸다. 이인임(박영규 분)이 경고한 바로 그것이다. 바로 어제까지 사이좋은 모자지간이었을 것이다. 비록 제 배로 낳은 자식도 아니고,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서로 함께 도와가며 어려운 순간들을 헤쳐오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방원도 믿고 신덕왕후에게 자신을 도와달라 부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왕위에 대한 욕심이 결국 두 사람을 갈라놓고 말았다. 어차피 적장자인 이방우가 왕위를 물려받지 않는다면 누가 왕위를 물려받든 적장자계승의 원칙은 무너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섯째인 이방원이 왕위를 물려받든, 막내인 이방석이 왕위를 물려받든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스승과도 같던 정몽주를 베었다. 친아들처럼 여기던 이방원을 뒤에서 배신한다. 권력이란 그런 것이다. 아버지가 자식을 죽인다.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다. 친형제간에도 피를 본다. 음모를 꾸미고, 함정에 빠뜨리며, 직접 칼을 들고 손에 피를 묻힌다. 막아서면 벤다. 방해가 되어도 벤다. 성가시고 거추장스럽다면 역시 베어서 치운다. 권력이 전부다. 권력이야 말로 모든 것이다. 그만한 각오가 있어야 권력을 가질 수 있다. 권력을 가지고 지킬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이성계에게는 권력 말고도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다. 정도전조차 자신이 겨우 손에 넣은 새로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오랜 친구이던 이숭인(정희태 분)을 때려죽이라 시키고 있었다. 권력의 정점에 서기에 이성계는 너무 무르고 너무 순진했다.


하기는 정도전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정도전은 덕을 말한다. 덕이 있는 자가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 어째서 장자계승인가. 어째서 공을 따지는가. 납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방우였다면 아예 이견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적장자란 왕위계승에 있어 대전제와 같기 때문이다. 아니 하다못해 이방과만 되었어도 이방원 역시 명분상 크게 불만을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방원이 세자로 책봉되었다면 그가 새로운 왕조를 여는데 세운 공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준이다. 그러므로 모두는 적법한 절차와 합리적인 기준에 의해 세워진 세자에 대해 동의하고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명분적 당위는 곧 강제가 되고 의무가 된다.


그러나 덕은 다르다. 덕이 있고 없고를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하는가. 덕이 있는 자가 왕위를 물려받는다면 왕위를 욕심내어 덕이 있는 것으로 꾸미는 것을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 납득하기도 힘들고 동의를 이끌어내기도 어렵다. 누군가는 불만을 가질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이 반감으로 이어질 것이다. 권력이란 그러라고 한다고 순순히 그리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인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안정적인 문명을 발달시켜 온 많은 문화권에서 장자계승을 하나의 원칙으로 확정해 놓은 것이다. 항상 지켜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로 인한 혼란을 최소화시킬 수는 있었다. 어쩌면 정도전 자신 역시 권력이라는 속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 친구를 죽였다. 큰아들이 자신을 등졌다. 그런데 이제 왕위를 사이에 두고 아내와 아들이 서로 다투려 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들을 중심으로 그를 왕위에 올린 신하들이 헤쳐모인다. 왕위만 욕심내지 않았다면. 괜한 욕심으로 왕위에 오르지만 않았다면. 하지만 결국 알면서도 욕심낼 수밖에 없는 것이 왕이라는 자리인 것이다. 권력이라는 유혹이다. 차라리 해맑다. 용상에 올라 짐짓 왕의 말투와 표정을 해보이는 이성계의 모습이 아이처럼 투명하다. 권력을 탐내는 것은 마치 아이의 순수와도 같은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역설의 비극이다. 이제 왕으로서 이성계 자신이 잃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루어진다. 왕위에 오르는 것이 끝이 아니다.


어쩌면 하륜(이광기 분)만이 진정으로 권력의 속성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권력의 정점에 있던 이인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봐 왔었다. 권력이란 무엇이고,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에서 수도 없이 지켜보았고 경험해 왔었다. 누가 권력을 가져야 하는지, 누가 권력에 가장 가까이 있는지, 그러므로 누가 어떻게 어떤 행동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도. 마지막 과정이다. 혁명은 이상으로 하지만 결국 정치란 권력이다. 국가란 권력이다. 권력의 이동이다. 이상은 이제 퇴장할 차례다.


권력의 이동에는 항상 피가 뒤따른다. 권력이란 구조다. 기존의 구조를 새롭게 뜯어고치려면 당연히 파열음이 날 수밖에 없다. 기존의 구조에 충실하던 구세력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권력으로 그 자리를 채워야 한다. 잊게 만들어야 한다. 지금의 권력만을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몽상이었다. 하나의 왕조를 무너뜨리는데 피를 흘리지 않겠다 한 것은. 세월이 흐르기 위해서도 먼저 그같은 불안요인들부터 지우지 않으면 안된다. 정몽주마저 죽이고 이룬 혁명을 이대로 무너뜨릴 수는 없다. 정몽주의 죽음에 당당해지고 싶다. 정도전의 표정없는 얼굴에서 소름끼치는 서늘함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새로운 왕조를 위해 걸었다. 피를 묻히고 오명 속을 걷는다.


파열음이 인다. 권력이 균열을 불러일으킨다. 증오가 생기고 원망이 생긴다. 동지였을 텐데도. 가족일 텐데도. 권력이 주어졌다. 왕이라는 가장 존귀한 자리가 바로 손닿는 곳에 있다. 인간이 슬픈 이유다. 그런 자들이 왕이 된다. 권력을 손에 쥔다. 인간이다.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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