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 - 배신하지 않는 지나온 시간들에 대해

까칠부 2014. 10. 27. 04:42

사람들은 너무 쉽게 지난 시간들을 잊거나 무시한다. 허튼 과거는 없다. 허튼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배신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바로 자신이다. 아무리 바둑을 그만두려 해도 바둑을 위해 보낸 시간들이 여전히 장그래(임시완 분)에게는 남아있다. 잊지만 않는다면 그 시간들은 지금도 장그래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빌려준다. 그만큼 충실한 시간들을 지나왔다면.


스펙이란 어쩌면 그같은 시간들을 계량하기 위한 기준과 같은 것일 게다.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가. 얼마나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시간과 노력들을 투자해 왔는가. 많은 유혹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렵고 힘든 순간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또래의 거의 대부분이 오로지 한 가지 더 나은 스펙을 가지기 위해 때로 목숨까지 내건 경쟁에 내몰린다. 자신이 가진 스펙이란 자신이 이겨낸 시간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고 최선을 다해 부딪혀 왔다. 자신에게는 그만한 능력과 자격이 있다.


하지만 과연 모든 사람이 같은 시간을 가지는가. 프로바둑기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바둑실력 뿐이다. 영어도 수학도 필요 없다. 고등학교 졸업장도 필요없다. 어쩌면 더 치열하고 냉혹한 세계다. 다른 무엇도 필요없이 바둑실력 하나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시간이 어긋난다. 또래의 다른 아이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학교로 학원으로 가는 그 시간에 장그래는 오직 바둑판 앞에만 앉아 있다. 그리고 어긋났던 시간들이 다시 만난다. 바둑을 그만두고 회사원으로서 필요한 아무것도 갖주치 못한 상태로. 그래서 그 시간들은 의미없었는가.


어쩌면 그것은 통쾌함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시간이 하나의 선만을 지나는 것은 아니다. 여러 다른 시간들을 지나온다. 한때 꿈이었다. 삶이고 미래였다. 그러나 결국 다른 사람과 같은 시간 위에 서 있다는 것은 그 시간들을 포기하고 지나와야 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들이 의미없는가. 그 시간들의 열정과 노력들이 가치없는 것이었는가. 단지 그것이 장그래에게는 바둑이었을 뿐이다. 시간은 배신하지 않고 장그래의 새로운 시간과 길을 위해 지혜를 빌려준다. 허튼 시간들이 아니었다. 허튼 노력들이 아니었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았다 말해야 할 만큼 안타깝고 아팠던 시간들이었다. 시간만이 그의 편에 있다.


원작과는 호흡이 상당히 다르다. 한 회 연재분 안에 또 하나의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연재만화지만 한 회의 연재분이 하나의 완결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한 회 방영분이 하나의 호습을 이룬다. 압축해야 했고, 때로 어쩔 수 없이 나눠야 했던 내용들이 드라마의 시간 안에 재배열된다. 2차원의 한정된 지면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보다 복잡한 이야기들이 실제의 인물과 공간 속에서 더 정교하게 구체화된다. 상당히 관념적이던 원작에서의 입사하기까지가 오히려 드라마에서 더욱 현실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아마 웹툰이 아닌 잡지에 연재되거나 아니면 단행본으로 먼저 출판된 만화였다면 호흡은 그것과 전혀 달랐을 것이다. 드라마의 호흡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잘 녹아들고 있다.


아이돌출신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임시완은 젊은 매력 만큼이나 안정된 연기력을 보여준다. 이성민(오상식 역)이나 이경영(최전무 역)등 베테랑 연기자들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삶에 지치고, 꿈에 지치고, 현실에 지친 고단한 모습이 그의 귀태나는 곱상한 외모에 담겨 있다. 강소라(안영이 역) 역시 안정감과 매력으로 드라마에 힘을 불어넣는다. 드라마가 잘되려면 역시 주연이 잘해야 한다. 보고싶어지게끔 시청자를 홀려야 한다. 중견들이 주연들의 뒤를 단단히 받친다. 대본과 연출이 배우들의 연기에 생명력을 더한다. 언어와 영상으로 쌓아 올린 거대하고 견고한 성일 것이다. 원작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원작이 갖는 맛과 깊이를 충실히 살려 시청자에게 전한다. 드라마는 다름아닌 드라마이기에 재미있다.


어차피 드라마란 판타지다. 만화 역시 현실을 대신한 판타지일 것이다. 드라마이기에 가능하다. 만화이기에 가능하다. 그래서 만화같다고 하고 드라마같다고 말한다. 만화의 재미이고 드라마의 재미다. 치열한 리얼리티는 그것이 단지 꿈임을 잊게 만들고, 달콤한 꿈은 다시 현실이 현실인 것을 잊게 만든다. 그 짜릿함에 하루가, 그리고 일주일이 너무 길었다. 4회를 다 보고 글로써 정리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말이 넘치고 감정이 넘친다. 글이 절로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만화를 원작으로 드라마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원작의 팬이 존재한다. 원작의 맛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드라마에 맞는 새로운 개성과 재미를 시청자에게 선보일 수 있어야 한다. 원작은 원작대로 드라마는 드라마대로 재미있고 특징이 다르다. '라이어게임'에 이은 만화원작 드라마의 이상적 형태일 것이다. 그 치열함에 감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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