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회

대한민국과 욕망사회의 이유...

까칠부 2015. 1. 25. 02:16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모두 5단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될 때 상위단계의 욕구를 추구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 배가 고프면 일단 밥부터 먹어야 한다. 배가 부르고 나면 그때는 안전한 곳에서 편안히 쉬고 싶어진다. 몸과 마음이 편해지면 그때야 비로소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주위가 자신을 보는 눈에 보다 신경쓰게 된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마침내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마지막 메타욕구가 생겨난다. 인간의 존엄과 양심, 무엇보다 자유에 대한 갈구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면 된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메타욕구는 이전의 4단계의 결핍욕구가 모두 충족되었을 때 나타난다. 다시 말해 이전의 4단계 욕구가 전혀 충족되지 않고 있다면. 충족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전혀 없다면.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존경받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이 없다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생존도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얼마나 벌어야 충분한 돈을 벌었다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바로 한국사회, 아니 현대의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여러 문제들의 근본적 원인일 것이다.

 

더 많은 돈, 그보다 더 많은 돈, 그보다 더 더 많은 돈을. 국민소득 1만불에서 2만불로, 다시 3만 불로, 4만불을 향해. 그러니까 아직 부족하다. 더 벌어야 한다. 더 많이 벌어 더 잘살아야 한다. 그렇기때문에 지금은 아직 이르다. 안전조차 돌아보지 않고, 주위와의 관계도 돌아보지 않고, 양심도 체면도 인정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존엄도 자유도 단지 사치에 불과하다. 그래서 더 가난해져야 한다. 더 부유해져도 더 가난해지지 않으면 안된다.

 

졸지에 생떼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사회가 시끄럽고 경제가 어려우니 침묵할 것을 강요한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자기에게 피해가 돌아올 것 같으니 슬픔마저도 금지하려 한다. 한국사회의 공감능력은 여기까지 떨어져 버렸다. 아이들 먹이는 일에 당장 자기가 낸 세금부터 생각한다. 어린이집 폭행사건에 분개하면서도 정작 자기가 낸 세금으로 어린이집을 늘리는 것은 아까워한다. 내가 낸 돈인데 어째서 다른 사람을 위해 써야만 하는가. 한국사회에서 복지와 관련한 논의가 불가능한 이유다. 복지를 하기에는 아직 사회가 너무 가난하다.

 

돈이 부족해서일까? 한국사회에서 돈이 부족하다고 하면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가 손가락질할 것이다. 단지 그 기대치가 다른 것이다. 항상 그 한계를 높여 놓는다. 그렇게 도저히 충족될 수 없도록. 만족하는 일이 없도록. 그럼으로써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유를 잃게 된다.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들만이 그 간절한 욕구를 충족할 방법을 알고 있다.

 

지배의 기술이다. 어째서 가난한 자들이 부유한 자들을 위해 투표하는가? 가장 결핍해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가장 만족을 바라니까. 이미 커져버린 기대치를 자신의 현실로써는 도저히 충족시킬 방법이 없다.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이다. 꿈이 좌절조차 잊게 만든다. 환상이 현실을 잊도록 만든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희망을 쫓아서.

 

더 많은 돈을 위해. 더 큰 성공을 위해. 더 많은 것들을 가지고 누리기 위해서. 만족할 줄 모른다. 그러나 만족해야 한다. 모순이다. 챗바퀴 너머를 보고 다람쥐는 끊임없이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