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특히 선조실록이 아쉬운 것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선조가 몽진하는 과정에서 당시까지의 사초가 모조리 소실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유독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선조실록만이 임진년까지의 기록이 매우 부실하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가 없어 관과 민간의 기록까지 모두 뒤져 복원한 것이기에 정확성도 의심받고 있다. 그것이 결국 인조반정 이후 최초의 개정판실록이라 할 수 있는 '선조수정실록'이 나오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
과연 실제의 선조(김태우 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류성룡(김상중 분)는 또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산해(이재용 분)와 윤두수(임동진 분), 관동별곡의 정철(선동혁 분)과 '오성과 한음'으로 더 유명한 이항복(최철호 분), 이덕형(남성진 분), 그 밖에 조선예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송익필(박지일 분)과 이이와 더불어 서인의 정신적 지주이던 우계 성혼(김효원 분)등등. 조선의 조정에서는 과연 그들 자신과 그들 자신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었을까? 드라마란 그같은 상상력을 구체화하는 과정일 것이다. 기록이 부실하다는 것은 그만큼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실제 있는 기록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조가 과연 드라마에서처럼 통신사 파견을 대신들과 대립해가며 반대하고 있었는가? 결국은 한국역사드라마에서 관습이 되어 버린 구태의연한 왕권과 신권의 대립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왕권강화를 꾀하는 왕을 보좌하는 근왕파 대신과 사대부로서 신하의 입장과 권리를 앞세우는 신권파의 갈등관계다. 하필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으로 선조에 대한 애닲은 충성심을 노래한 정철이 서인의 영수로서 등장하고 있었다. 아니기를 바라는 것은 그렇게 역사가 간단치만은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선조는 이후 관저의 사건을 통해 정철을 필두로 서인마저 제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권마저 위협하던 훈구파를 대신하여 아직은 보다 청렴하고 강직한 사림의 선비들을 대거 등용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이들 사림이 항상 왕에게 협조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종직의 '조의제문'이나 중종마저 지치게 했던 조광조의 도학정치가 보여주듯 그들은 순수한 만큼 보다 성리학적 이상에 충실하려 했고 그서은 왕 자신에게 어느새 부담이 되고 있었다. 방계로서 부족한 정통성을 대신하고자 사림의 지지를 등에 업기 위해 사림을 대거 등용했지만 어느새 훈구파만큼 비대해진 - 더구나 명문까지 확보하고 있는 사림의 존재는 그렇지 않아도 정통성에 대한 열등감으로 예민해져 있던 선조에게 불편하게 여겨지기 쉬웠다. 어떻게든 조정에서 사림의 힘을 꺾고 그 위에 서지 않으면 안된다. 단지 그러면서도 누구로부터도 비난받지 않는 - 왕으로서 자신의 명분과 정통성을 지킬 수 있는 확실한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 끝은 자기가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정여립의 모반에서 시작된 기축옥사 역시 시작은 송익필이 했지만 끝을 본 것은 선조 자신의 의지였다. 정철이 물러난 뒤에도 이발의 팔순노모와 8살 아들까지 국문하여 죽인 것은 선조 자신의 의지가 개입된 결과였다. 정여립이 실제 모반을 계획했는가에 대해서조차 불분명한 부분들이 많은데, 더구나 이후 사소한 꼬투리만으로도 정여립의 당여로 몰아가는 정국에서 선조는 그러한 주장들을 대부분 받아들이며 사건의 확대를 최소한 방조하고 있었다. 결국 천 여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목숨을 잃고, 호남의 동인은 아예 씨가 말랐으며, 조정을 채우고 있던 동인의 인사들은 모두 죽거나 물러나고 있었다. 건저의로 정철을 비롯 서인 다수를 제거했으니 - 더구나 서로 죽고 죽이며 원한이 깊은 가운데 왕권에 도전할 세력이 남아있을 리 없다. 과연 그런 선조가 윤두수라고 마음을 열었을까?
지켜봐야겠지만 지나치게 인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선조 자신도 그리 말하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고 싶다고. 그러나 숙종과 더불어 조선의 임금 가운데 가장 정치적으로 노회한 수단을 보여주던 이가 바로 선조였다. 신하들 앞에서 있는대로 감정까지 드러내며 자신의 속내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기축옥사는 정철의 잘못이고, 이순신을 천거한 것은 류성룡의 죄다. 자기는 잘못한 것이 전혀 없다. 하지만 드라마라는 점에서 흥미를 끄는 설정이기는 하다. 인간 선조가 자신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무고한 이들의 목숨까지 아무렇지 않게 빼앗게 되는 과정들이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 선조의 미숙함은 결국 윤두수의 비중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시 한 번 윤두수가 비난의 중심에 서게 될지 모르겠다.
참고로 기축옥사는 앞으로 일어날 임진왜란의 주역 이순신과도 관계가 없지는 않은데, 원래 선조에게 이순신을 천거했던 인사 가운데 하나가 다름아닌 정여립과 연루되어 죽은 정언신이었다는 사실이다. 니탕개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할 당시 함경도도순찰사이던 정여립의 휘하에 이순신이 따르고 있었던 인연이었다. 이때 이순신의 실력과 인품을 눈여겨보고 이후 그러니까 지금 드라마속 시간인 1589년 선조가 무장을 추천하라 하자 그의 이름을 천거한다. 이때 정언신과 함께 이순신을 천거한 것이 이산해였는데, 정여립의 모반에 연루되어 정언신은 죽고 이산해는 힘을 잃는다. 어쩌면 덕분에 선조에 의해 전라좌수사로 제수되기까지 조정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지킬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나치게 현실을 의식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하필 통신사와 관련한 논쟁에서 북한에 대한 어떤 입장차이들을 떠올리게 된다. 조선을 약탈하던 왜구와 대한민국의 영해와 국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북한의 존재, 그리고 그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들. 그럼에도 관용으로 저들을 달랠 것인가, 아니면 단호하게 관계를 끊고 끝까지 적대할 것인가. 여기에 선조가 가지는 정통성에 대한 근본적인 열등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임금을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 아마 같은 동인인 김성일의 지금까지도 비판받는 어떤 선택에 대한 묘사 역시 그 연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예감도 가져본다. 단지 서로 방법만 달랐을 뿐이다.
고증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다. 역시 사료의 문제도 있을 것이다. 징비록 역시 그렇게 구체적인 사실을 충분히 기록해 놓은 사료는 아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까지 선조실록의 내용 역시 상당히 부실한 편이다. 일본쪽에 대한 묘사는 무성의에 가깝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김규철 분)도, 일본의 여러 주요인물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가는 수준이다. 하기는 어차피 조선의 입장에서 그려지는 드라마일 테니 그리 심각하다 할 정도는 아니다. 악역은 악역이면 족하다. 다만 이것은 역사드라마이기도 하다. 조금은 욕심이었을 것이다.
굳이 류성룡이 자신의 주자을 관철하기 위해 왕과 대립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류성룡의 캐릭터와도 맞지 않는다. 재상이란 조정자다. 왕과 대신들을, 대신과 대신의 사이를 중간에서 조율하는 역할이다. 아직은 젊은 탓일까? 이산해가 류성룡의 스승역할인지도 모르겠다.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도 결국에는 자신이 의도하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그것이 정치일 테지만. 류성룡의 강점은 비타협적인 강직함이 아닌 유연함에 있었을 것이다.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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