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립이 대마도주가 보내온 조총의 위력에 대해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신립 자신이 화약무기에 대해서도 상당히 정통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방에서 여진족과 여러차례 전투를 벌이며 특히 승자총통을 사용해 큰 전과를 거둔 적도 있었기에 화약무기에 대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화약무기에는 여러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일단 드라마에서와 같이 장전하고 사격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더구나 아직 기술적인 미숙함으로 인해 명중률 또한 크게 기대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것은 이후로도 상당기간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고, 따라서 그를 보완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총기의 집단운용 전술이 발달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총기를 위한 전술이라기보다는 이미 활과 쇠뇌를 사용하면서 연사력과 명중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고안되어 실행되었던 전술의 응용이었다. 다수의 총병이 시간차를 두고 장전하고 사격함으로써 사격간의 간격을 상쇄하고, 동시에 발사된 다수의 탄환은 명중률을 의미없게 만든다. 다만 문제라면 과연 당시의 생산력으로 그만한 물량의 총기와 화약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의 오다 노부나가가 3단철포 전술의 창시자로 여겨지게 된 이유였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최초로 집단으로 철포를 운용한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신립(김형일 분)이 고니시(이광기 분)에게 패하면서 임진왜란 초반의 전황을 결정지었던 탄금대 전투에서도 신립의 기마대를 막아선 것은 일본의 조총병이 아니었다. 기병의 돌파력을 약화시킨 습지대였고, 전국시대를 거치며 단련된 고니시의 노련한 병력운용이었다. 무엇보다 신립의 조선기병은 정예와는 거리가 먼 급조된 병력이었고, 고니시의 일본군은 얼마전까지 계속된 전란의 시대에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던 역전의 노병들이었다. 숙련된 병사의 손에 들려진 일본도는 차라리 조선군에게 조총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다. 단병전에서의 열세는 기병이 보병에 대해 가지는 우위마저 무위로 만들 정도였다. 그 위에 조총의 일제사격이 쏟아진 것이었다. 무기 하나의 성능이 아닌 그 무기를 운용하는 전술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이었다. 처음 화승총이 발명되고서도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유효한 수단으로 전장에 등장할 수 있었다. 단지 한 번의 시범만으로 그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원래 정여립의 모반에서 시작된 '기축옥사'는 몇 개의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고 있었다. 정여립의 모반이 밝혀지고, 정여립의 자살 이후 그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이들이 처벌받았으며, 어느 정도 일단락된 상태에서 선비들의 상소를 통해 그와 간접적으로 연루된 이들이 밝혀지고 있었다. 이발이나 정언신 등 역시 정여립의 모반에 가담한 직접적인 증거가 아닌 정여립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빌미로 간접적인 혐의만을 물어 죄를 묻게 된 경우였다. 사소하게 편지나 사람이 오고간 것만으로도 모반에 연루된 증거가 되었다. 그것을 판단한 것은 다름아닌 선조였다. 상소가 있고, 대신들의 건의가 있으면 한 번 물렸다가 이내 허락해준다. 사실 그 과정들이 보여져야 기축옥사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시작은 서인이 했지만 불을 지핀 것은 선조 자신이었다. 정철이 물러난 뒤에도 선조에 의해 이발의 노모와 어린 자식이 고문받아 죽고 있었다. 그 과정은 다시 이후 정철이 물러날 때 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이유로 이어진다.
조정을 장악하고 당론으로 선조 자신을 압박하던 동인을 서인을 이용해 치워냈다. 그러나 서인만 조정에 남는다면 다시 동인의 전철을 밟아 마찬가지로 중론을 앞세워 자신을 압박하려 할 것이다. 어차피 서인이 동인의 피를 보았으니 동인 또한 서인에 대해 가지는 원한이 작지 않을 것이다. 이산해와 류성룡은 바로 그같은 동인을 겨누는 선조의 칼이었을 것이다. 실제 이산해의 계략에 넘어간 정철은 건저의 사건을 통해 실각하여 서인과 함께 관직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과연 조정의 중심은 누구인가? 나라의 주인은 누구인가? 동인이든 서인이든 결국 자신들의 당론을 관철하고자 한다면 누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균형을 맞추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자신 앞에서 두 당파가 경쟁하는 것 뿐이다. 아마 임진왜란만 아니었다면 영정조의 탕평은 선조대에 벌써 시작될 수 있지 않았을까. 차라리 대놓고 가식적으로 보이는 류성룡을 향한 선조의 온정이 섬뜩하기조차 하다. 이런 것이 정치인가.
그 대단해 보이는 송익필(박지일 분)조차 선조를 위한 장기말의 하나에 불과하다. 모든 계획은 송익필이 꾸몄지만 그를 이용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도 아닌 선조 자신이다. 정철이 모든 일을 행한 것 같지만 그 역시 정철의 말처럼 선조 자신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을 것이다. 이산해는 그것을 한 눈에 꿰뚫어본다. 오히려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고 있기에 정철 등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류성룡을 살리겠다 결정하는 순간 비로소 깨닫는다. 그런데도 정작 선조 자신의 의도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귀인 김씨(김혜은 분)과의 대화를 통해서나 슬쩍 암시하듯 들려지고 있을 뿐이다. 감탄한 부분이다. 오히려 진심인 것 같아서 더 무섭게 느껴진다. 세상을 속이고 자기 자신마저 속인다. 인간다운 나약한 모습 뒤에 모든 것을 굽어보는 무심하고 잔혹한 왕의 얼굴이 숨어 있다. 김태우의 비열한 연기가 사극과 만나 그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쩌면 진짜 선조도 이렇지 않았을까.
토요토미 히데요시(김규철 분)의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도가 고니시 유키나가(이광기 분)를 통해 구체화된다. 아직 그 사실을 조선의 조정은 모른다. 다만 이 시기 - 드라마의 시간인 선조 22년 1589년에는 선조에 의해 변란을 대비하여 불차채용할 장수를 천거하라는 지시가 비변사에 내려진다. 이때 천거된 이 가운데 정발과 박진, 그리고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다. 비격진천뢰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남모르게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며 국방에 힘쓰고 있다. 그 비밀이 새어나간 것이 선조가 입장을 바꾸어 통신사를 보내는 계기가 된다. 다만 일개 왜구의 앞잡이에 불과한 조선인에게까지 그 사실이 새어나갈 정도로 일본도 관리가 허술하다.
조금 간략하게 넘어간 것이 있다. 정여립의 모반에서 기축옥사로 이어지기까지 고작 정철과 성혼(김효원 분), 송익필 정도만이 모여서 모든 계획을 꾸미고 주도하고 있다. 아무래도 전작 '정도전'이 보여주던 스케일과 치밀함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러운 부분일 것이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장면일 수도 있다. 더 중요한 장면들이 기다리고 있다. 조금 아쉽다.
http://www.stardail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269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드 지킬 나 - 구서진이 된 로빈, 구도가 명확해지다 (0) | 2015.02.19 |
---|---|
펀치 - 너무나 쉽고 어려운 한 마디, 법은 하나다! (0) | 2015.02.18 |
펀치 - 그래, 내도 이런 일 할 놈 아니었데이! (0) | 2015.02.17 |
징비록 - 약간의 아쉬움과 조금 더 큰 기대, 시작하다 (0) | 2015.02.15 |
역사드라마속 왕권 vs 신권...? (0) | 2015.02.14 |